유럽 오페라 무대 누빈 성악가
은퇴 뒤 말라위서 선교사 삶
고아 돌보며 음악으로 희망 전해

유럽 오페라 무대의 프리마돈나에서 아프리카 아이들의 ‘엄마’로 삶의 후반부를 봉헌한 성악가 김청자(아녜스)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5일 암으로 선종했다. 향년 82세.
1944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 진명여고를 졸업한 뒤 1963년 외국인 신부의 도움으로 독일로 건너갔다. 간호조무사로 일하면서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성악을 공부했고, 이후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수학했다.
1970년 스위스 베른 오페라 극장과 전속 계약을 맺고 모차르트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로 유럽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독일 카를스루에와 뒤셀도르프 등 유럽 무대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했다. 국내에서는 중앙대와 연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94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하지만 고인의 삶을 크게 바꾼 것은 아프리카와의 만남이었다.
고인은 2006년 가톨릭평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년퇴임 후 아프리카로 떠나겠다는 뜻을 일찌감치 밝혔다. 안식년 중 찾은 잠비아에서 하루 한 끼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는 아이들과 에이즈 환자들을 만나면서 자신을 부르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꼈다고 했다.
특히 200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의 한 성당에서 봉헌한 미사는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이사야서 6장 8절 말씀이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고인은 2014년 가톨릭평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며 “내가 있을 곳이 이곳 아프리카라는 걸, 주님께서 부르시는 곳이 이곳이라는 걸 확신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한국과 아프리카를 오가며 선교지를 돕던 고인은 2010년 집을 팔고 한국 생활을 정리한 뒤 말라위 카롱가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집을 판 돈 2억 원으로 후원회를 만들고, 우물을 파고 병원에 침대를 지원하며 고아와 청소년들을 돌봤다.
음악 교육도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아들을 돌보는 데 전념할 생각이었지만, 한국에서 음대 교수를 지낸 선교사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음악을 배우기 위해 두 시간을 걸어온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음악 교육은 ‘루수빌로’ 음악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희망’이라는 뜻을 지닌 학교에서 고인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새로운 꿈을 심었다. 제자들이 말라위 전국 음악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고, 일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장학생으로 유학하는 결실도 맺었다.
고인은 당시 가톨릭평화신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진 것을 다 내놓고 나니 홀가분했다”며 “필요할 때마다 채워주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걸 알기에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프리카에서의 삶이 언제나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타는 듯한 더위와 인간적 외로움, 믿었던 이들의 배신과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모든 것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고인은 그 시간마저 신앙 안에서 받아들였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끝나지 않는 피정이랄까요. 아프리카는 내가 스스로 들어간 좁은 문이에요.”

음악 역시 고인에게는 신앙을 살아가는 또 다른 길이었다. 고인은 2006년 가톨릭평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미 10여 년 전 “앞으로 내 노래는 모두 하느님께 바친다”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이후 화려한 세속 무대보다 미사와 기도회, 성전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한 작은 무대를 즐겨 찾았다.
2022년 암 선고를 받은 뒤에도 말라위로 돌아가 음악학교 운영을 이어갔다. 2024년에는 아프리카에서 펼친 교육과 봉사 활동 등을 인정받아 삼성행복대상 여성창조상을 받았다.
2014년 가톨릭평화신문과 만난 고인은 “내일 하느님께서 날 데려가신다고 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유럽 오페라 무대의 프리마돈나로 출발한 그의 음악 인생은 그렇게 아프리카 아이들과 함께하는 선교의 삶으로 이어졌다. 그가 스스로 택한 ‘좁은 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