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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암이주여성센터 박향아(오른쪽, 율리아)씨가 갈 곳 없는 걱정에 울먹이는 살발돌씨를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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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출신 벨렌지 살발돌(45)씨가 부푼 꿈을 안고 한국 땅을 밟은 것은 12년 전인 1997년의 일이다. 의정부에 있는 양말공장에서 일하던 살발돌씨는 당시 대다수 이주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3개월짜리 비자가 만기가 되면서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됐다. 그 무렵 같은 공장에서 기사로 일하던 한국인 김모씨를 만나 이듬해인 1998년 아들 진호(가명)를 낳았을 때 살발돌씨는 자신이 꿈꾸던 코리안 드림이 이뤄진 줄 알았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새로이 사업을 시작한 남편은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점점 술을 찾았고, 살발돌씨에게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국말이 서툰 살발돌씨는 남편이 때리면 맞고 눈물만 흘렸다. 어디 하소연할 데도, 도망갈 곳도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들 진호에 대한 폭력이었다. 진호의 팔을 부러뜨릴 만큼 폭력이 심해지자 살발돌씨는 2005년 아들과 함께 집을 뛰쳐나왔다.
한동안 숨어지내다 다시 일을 시작한 살발돌씨는 2007년 진호를 필리핀 친정으로 보냈다. 친구 집에 얹혀 살면서 공장에서 일하느라 진호를 돌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친정 엄마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무도 진호를 보살필 수 없게 되자 2008년 봄 진호를 다시 한국으로 데려왔다. 1년간 엄마랑 떨어져 지낸 진호는 어릴 때 가정폭력 후유증과 행동장애가 겹쳐 요즘 좀처럼 엄마랑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살발돌씨는 8월 17일 다문화 긴급의료비 지원을 받아 자궁근종 수술을 받았다. 수술 직전 엄마와 아들은 같은 걱정을 했다. `내가 죽으면 어쩌지…`, `엄마가 죽으면 어쩌지…`
돌봐주는 이 하나 없이 외로이 병실을 지켰던 살발돌씨는 8월 22일 퇴원하고 서울 방화동 지하 단칸방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하나뿐인 혈육 진호가 엄마를 반겼다.
살발돌씨는 이제 지금까지 해왔던 양말공장 일을 하지 못한다. 수술 받은 몸으로는 하루 12시간 서서 일하는 고된 노동을 견딜 수 없다. 월세 10만 원짜리 단칸방은 양말공장 사장이 보증금 820만 원을 빌려줘서 얻은 것이다. 양말공장을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된 이상 보증금을 돌려줘야 하고, 집을 나와야 한다. 수술받은 직후라 당분간은 요양이 필요하다. 성치 않은 몸으로 가뜩이나 실업자가 넘치는 세상에서 일자리나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살발돌씨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아직도 한국말이 서툴러 초등학교 4학년인 진호의 학교 알림장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살발돌씨에게 소원을 물었더니 "건강하게 진호랑 같이 사는 것"이라면서 눈물을 쏟았다. 진호가 얼른 휴지를 가져다 주더니 "울지 마라"며 어른처럼 엄마를 달랬다.
살발돌씨는 "진호가 밥도 하고, 일도 많이 도와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대견해했다. 외로운 엄마와 아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마음 편히 발뻗고 누울 수 있는 방 한 칸이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