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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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필리핀(3)마닐라 80%가 물에 잠겼다는데 - 박찬인 신부(대전교구)

절망적 현실에도 웃음 잃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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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민촌 사람들은 홍수 피해에도 불구하고 즐거워 보였다.
절망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사진은 거리에서 아이와 놀고 있는 아버지.
 
 
 이곳으로 파견되기 전 필리핀에 관한 뉴스를 종종 접하곤 했는데, 필리핀은 매년 태풍과 홍수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고 많은 사람이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에 시달린다고 들었습니다.

 필리핀 기후는 크게 건기(12월~4월)와 우기(5월~11월)로 나뉘는데, 태풍은 주로 우기에 집중됩니다. 필리핀에서 태풍 피해가 심한 이유는 필리핀이 태풍의 길목인 태평양 부근에 있고, 비가 잦을 뿐만 아니라 강수량도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필리핀 정부가 홍수에 관한 대책을 효과적으로 마련하지 못하고 배수시설 등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국민들 고충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 같습니다. 마닐라에 살면서 태풍을 직접 경험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답니다.

 지난해 8월에 이곳 말라떼 하늘에 갑자기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두 시간 정도면 그칠 거라 생각했습니다. 한여름에 내리는 소나기의 느낌은 아마도 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한두 시간 동안 쉼 없이 쏟아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이 걷히고 맑아지는 그런 풍경 말입니다. 하지만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정말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장대비가 며칠간 하염없이 내리더군요.

 나중에는 그치지 않는 비를 바라보면서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주춤해지자 주변 신자들이 걱정됐습니다. 빈민가 사람들이 가장 마음에 걸렸습니다. 빈민가를 살펴보려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섰습니다.

 막 성당 밖을 나서려는데 경비원이 다가와 "본당 신자가 무언가 축복을 부탁하는데 시간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성당으로 와 달라고 청했습니다. 잠시 후 빈민지역에 사는 한 가족이 라면상자를 품에 안고 성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그 상자를 제의실 탁자 위에 놓고 제게 축복을 청했습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해 열어 보려하자 가족들은 당황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무엇인지도 모르고 축복을 줄 수는 없기에 상자를 열어봤습니다. 잠시 멈칫했습니다. 상자 안에는 예쁘게 화장을 한 1살쯤 돼 보이는 아기가 누워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잠든 아기를 데려오려고 상자를 이용한 줄 알고 아기에게 다가갔습니다.

 아기를 자세히 본 순간 필리핀 문화와 정서를 몰라도 정말 몰랐던 저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기는 이번 홍수 때 전염병에 걸렸고, 하느님 품으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화장(火葬) 전, 제게 축복 기도를 청하고 고별식을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고별식 내내 엄마는 숨죽여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족들에게 사제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대신해 축복을 주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후 며칠 동안 네 명의 아기를 하느님 품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가난 앞에서 아픈 아이를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너무나 마음 아팠습니다.

 고별식을 마친 후 마음을 추스르고 빈민가로 향했습니다. 비가 다시 거칠게 쏟아졌습니다. 심한 바람 때문에 우산은 있으나마나였습니다. 성당 주변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습니다.

 대부분 지역이 무릎 위까지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도 동네 아이들은 트라이씨클(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삼륜차)을 타고 다니며 놀더군요. 본당 학생들이 저를 알아보고 "Father! Father!"(신부님! 신부님!) 하고 소리치며 다가왔습니다. 아이들은 나와 동행하고 싶다는 눈빛으로 행선지를 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과 함께 동네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이색적인 풍경을 접했습니다. 예상과는 많이 다른 사람들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홍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시름에 잠겨 있거나 집안 정리를 하면서 물을 퍼내느라 정신이 없어야 하는데 말이죠.

 어느 집에서는 집 안에 물이 무릎 높이까지 차 있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며, 노래방 기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집을 방문하니 가재도구들을 물이 닿지 않는 곳에 두고는 태연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카드게임을 하거나 체스를 두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밖으로 나와 수영을 하거나 물장난을 하면서 현재 상황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를 알아보고 밝은 미소를 짓는 신자들에게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방문을 통해 느낀 점이 있습니다. 빈민가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홍수)이 매년 반복되다 보니, 절망하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이곳 사람들을 살게 하는 원동력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조그마한 위기를 겪거나 절망의 순간이 닥치면 몹시 괴로워하며 헤어나오지 못해 힘들어하곤 합니다. 저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절망적인 순간에 처해 있을 때 주님 안에서 희망을 바라보고, 위기를 삶의 또 다른 시작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길 소망해 봅니다.


후원 시티은행 108-16147-267-01  예금주 박찬인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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