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 프랑수아즈 드 살 아비아 성녀는 트루아에 있는 성모방문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마리 드 살 샤퓌 원장수녀와 루이 브리송 교목 신부를 만난 학교생활은 성녀가 앞으로 살레시오회 영성을 기반으로 젊은이들의 복음화에 헌신하는 수도회를 설립하는 기틀이 되었습니다.
1866년 산업혁명에 따라 저임금 노동자가 도시로 몰려들었는데 트루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수많은 어린 소녀가 방직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열정적인 사목자인 브리송 신부는 19세기 말에 본격화된 사회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1858년 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들에게 완벽한 인성과 그리스도교 교육을 위한 센터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사업’으로 알려진 이 센터의 적합한 책임자와 안정적인 관리자를 찾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영감 안에서 수도회를 설립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침 브리송 신부는 더 없는 조력자이자 수도생활을 향한 성소를 간직한 성녀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성녀는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영감을 받았는데, 이는 성녀가 자신의 고향인 세잔에서 유리제품을 만들고 수리하는 공장에 들어가도록 이끌었습니다. 작업장 안에는 젊은 공장 노동자들이 쉼 없이 일하고 있었고, 성녀의 마음 안에서는 그들을 상담하고 인도하고자 하는 열망이 솟아올랐습니다. 이런 열정은 브리송 신부가 트루아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설립한 센터에 성녀를 초대했을 때 더욱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1866년 성녀는 성모방문수녀회의 학교 동창생인 루시에 카뉘에와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며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사업’에 동참했습니다. 얼마 뒤 성녀는 수도복을 입으면서 ‘프랑수아즈 드 살’이라는 수도명을 받았습니다. 성녀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사업을 주네브교구 주교의 보호 아래 두고 이끌었으며, 그의 영성과 교수법을 완벽하게 적용했습니다. 그 후 성녀의 공동체는 자신들의 전 생애를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헌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오블라티 수녀회로 그 이름을 정했습니다.
1871년 성녀는 서원을 하고 새로운 수녀회의 총원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이듬해 교회법적 인준을 받은 수녀회는 급속히 발전하며 사회 사도직을 확장해 갔습니다. 동시에 본당들에 학급을 열고, 파리의 젊은 여성을 위한 첫 번째 기숙학교를 열어 8년 동안 성녀가 교장을 맡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오블라티 수녀회의 사도직은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교육 형태로 나아갔습니다.
1893년 성녀는 다시 총원장 수녀에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그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동안 성녀는 수녀회를 유럽과 남아프리카, 에콰도르에 진출시켜 교육 사도직을 전파하는 데 힘썼습니다. 1903년에는 프랑스 내에서 수도회에 반대하는 반종교적인 박해에 맞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수녀회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성녀는 이탈리아의 페루자로 본원을 옮겼습니다. 1911년 성 비오 10세 교황으로부터 수녀회에 대한 최종 승인을 받았습니다. 1914년 연로한 성녀는 페루자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고요함 속에 선종했습니다. 성녀는 1992년과 2001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시성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