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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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한반도에 평화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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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심 성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 되어,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한 핏줄 한 겨레이면서도” 서로 헐뜯고 싸우는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참으로 바라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둘로 갈라져 어언 칠십 년을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떠나온 고향을 잊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딱하고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해마다 6월 25일이 되면 주일과 평일의 구분 없이, 똑같은 성경 구절로 우리를 깨워주는 주님의 말씀이 무척 은혜롭게 다가옵니다. 용서를 당부하고 기도할 것을 청하시며 우리 모두가 “마음 속으로 뉘우치고”,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면” 그분께서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라는 약속에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기막힌 우리의 처지를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의 진심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은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 삶 안에서 ‘살아’ 생명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친히 당신의 마음을 읽는 방법을 깨우쳐주시고, 어떻게 당신을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을 통해서 그 길과 방법을 상세히,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거창하지 않은, 작고 사소한 일상을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으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는 진리를 모르지 않습니다. 이 작은 사랑의 실천이 성령님께 힘을 실어드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재료’임을 믿고 지냅니다. 그래서 더욱, 같은 민족끼리 갈라져 ‘원수’가 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습이 아픕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고 모자람을 가려주며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외면한 것이 들통난 기분입니다. 마음에 쌓인 증오를 멈추고 단호히 잘라내라는 말씀을 흘려들은 것을 들킨 느낌입니다. 악에 대한 ‘수동적 자세’를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걸, 부인할 수가 없으니 민망하고 송구하기만 합니다.

이리 긴 세월 동안, 판단하고 미워하고 외면하면서 서로의 마음에 지옥을 만들었으니, 무어라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절대로, 그러지 않기를 바라시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왕따가 된 북한에는 굶주리고 헐벗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남한의 부요와 사치에 대한 십자가를 대신 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믿음의 폭을 넓혀야겠습니다. 매일 밤 아홉 시에 바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에 진심을 모아야겠습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큰 믿음으로 도약해야겠습니다. 하여 잃어버린 우리의 평화를 되찾아야겠습니다.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첫 선포는 “회개하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틀린 길에서 벗어나고, 아닌 것을 고쳐 살으라는 당부였습니다. 무릇 회개란 서로가 같음을 인정함에서 비롯됩니다. 마음에 자리한 미움, 원한, 분노가 주님의 것이 아님을 처절히 깨달아,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온 삶의 양식을 하느님께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마음은 가볍지가 않습니다. 회개를 너무나 허술히 여기는 현실을 우려합니다. 은근슬쩍 ‘알아내지 못한 죄’라는 너울로 가려 덮어 두는 것으로는, 결단코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잘못한 이에게 베푸는 내 아량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용서에 감읍하여 바치는 감사와 찬미의 행위인 까닭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모든 선각자들은 지혜로운 삶의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좋고 귀한 것을 “네 힘으로 그것을 성취해 얻어 누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스스로 자신을 단련하고 연마해야 하느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이르지 않습니다. 다만 새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오롯이 의탁해 살아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당신께서 손수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물며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다짐의 증표로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너무너무 벅찬 은혜입니다.

꽤 오래, 오늘 강론을 ‘일흔 번의 용서’에 초점을 맞췄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르신 용서의 폭이, 큰 울림으로 제 마음에 담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와 함께 있겠다’는 주님의 약속에 감격합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바로 그 자리에 함께 계시겠다니, 횡재한 기분입니다. 오늘 바치는 한국교회의 기도에 함께하실 것이 틀림없으니,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이 글을 적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는 버림받고 외면당하는 이들을 절대로 소외시키지 않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이야말로 더 사랑하려고 노력함으로 서로가 존중하고 서로를 수용하는 복된 결과를 선물 받을 것이란 귀띔이라 믿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통 크게 축복하시는 주님께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도록, 섭리해 주실 것을 굳게 믿으며, 하늘의 성인들께 전구를 청합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이여, 갈라져 살아가는 저희 민족이 하나가 되도록 빌어주소서.

“평화의 모후시여,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해주소서. 아멘!”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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