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신부님, 질문이 있어요. 힘든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윤리잖아요. 교회의 사회교리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가톨릭 사회교리와 무신론에서 이야기하는 ‘어려운 이에게 선행을 베풀라는 입장’의 차이점은 뭔가요?
■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도와라?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아십니까?(루카 10,29-37) 강도를 만난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폭행을 당해 초주검이 됩니다. 요즘 말로 묻지마 폭행일까요? 지나던 사제와 레위인은 이를 외면합니다. 그런데 마침 어느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뭘까요?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따지거나 체면 차리지 말고 일단 도와주자는 겁니다.
그런데 숨겨진 2차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재발 방지입니다. 강도를 잡아 책임을 따지고 그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는 겁니다. 같은 일이 재발돼서는 안 되니까요. 그래서 사회교리에서는 교정 과정의 필요성을 언급합니다. 처벌과 징계가 아니라 유죄를 선고받은 이의 공동체 복귀를 도와주고, 범죄로 붕괴된 사회 관계에 화해를 가져다 주는 것이 목적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403항)
■ 숨겨진 핵심!
하지만 최종적 3차 주제도 있습니다. 뭘까요? 바로 복음 선포입니다. 불의의 피해를 입은 이에게나 죄를 지은 이에게나 하느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단락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성경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루카 9,20)
그럼 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서일까요? 답은 이것입니다. 복음이야말로 인간의 길이자 사회와 세상을 치유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사회의 갈등들, 인간 존재, 악과 고통, 이런 모든 질문의 답이 바로 복음에 있으며(14~17항) 그것은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신론과의 차이입니다.
■ 하느님 계시와 교리를 알아야
사회 문제의 해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냉전시대 교훈처럼 모든 사회제도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인간을 근원적으로 치유하고 변화시키며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회교리도 복음과 같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문제 해결을 위한 이념적·실용적 제도가 아닙니다.(72항) 복음이 없는 사회교리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역사가 증명해 왔듯 인간과 사회의 문제는 관념적 이데올로기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교리를 통해 구원의 길에 있는 인간을 돕고자 하지만(69항) 동시에 복음과 신앙의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70항 참조) 그리고 교회의 사회교리의 근본 토대는 성경의 계시와 교회 전통입니다.(74항) 하느님의 계시와 교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 분야를 복음화한다는 말은 복음에 나오는 의미와 자유의 힘을 인간 마음 속에 불어넣어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인간다운 사회를 증진한다는 뜻이다. 곧 하느님 나라와 더욱 일치하는 더욱 인간다운 인간 도성을 만든다는 뜻이다.”(「간추린 사회교리」 63항)
이주형 요한 세례자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