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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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25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삶의 자리에서 경계의 벽을 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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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낮추고 허물기

마태오복음 21장에 보면, 탐욕에 눈이 먼 소작인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종을 때리거나 죽입니다.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탐욕에 눈이 먼 소작인들에게 매 맞고 죽임을 당하는 소수의 종을 보며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소외된 이들인 비정규직 노동자들, 노숙자들, 장애인들, 무의탁 독거노인들, 이주노동자들, 이 땅에 시집온 동남아 여성들, 그리고 가난한 조부모와 사는 아이들입니다. 그들은 ‘가진 사람들’의 탐욕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많은 직장인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쫓겨나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습니다. 대학생들은 비싼 등록금을 내기 위해 빚을 내서 학교에 다니고 졸업하지만, 취업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무의탁 독거노인들과 장애인들은 복지 혜택을 받아야 하지만, 그들을 위한 복지 예산은 부족하고 건설과 개발 분야의 국가 예산만 늘어납니다.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들은 최저임금과 인종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한국 사회에 대해서 박노자 교수는 이러한 말을 합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전진하지 않으면 뒤로 미끄러지게 돼 있다. 지금 한국사회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백수가 되지 않고 자기 노동력을 팔 수 있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은 죽어라 ‘무한 학습 경쟁’을 벌여야 하고, 노동자가 되어 기업의 착취 대상이 될 젊은이의 양육과 교육 비용을 그 부모가 떠안고 있는데도 착취로부터 발생하는 이득은 모조리 기업인이 가져가는 이 상황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이 사회는 더욱더 경쟁, 불안, 공포의 암흑으로 떨어질 것이고 더욱더 흉악화, 폭력화, 범죄화될 것이다.”(박노자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참조)

복음에 나오는 포도밭의 상황처럼 때리고 죽이는 살벌한 사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경계 밖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과 마음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과 ‘천막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고, 마르코복음 9장에 보면 ‘제자 공동체 안에 있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데요.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호수아는 그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예수님은 그 경계 밖에 있는 이들까지도 품어 안는 뉘앙스의 말을 합니다.

모세는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0-41)라고 말합니다. 경계 밖에 있는 이들까지도 품어 안는 말씀인데요. 오늘 복음에 더 분명히 표현돼 있습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4)

주인과 같이 후한 마음이라면 어떨까요? 신학교 삶을 되돌아보면, 알게 모르게 서로를 후하게 대하고 품어 안는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학장배 축구대회가 있었습니다. 학년별 대항 축구대회인데요. 보통 축구를 잘하는 친구들이 주전 선수로 뛰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축구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경계가 생길 수 있는데요. 반 체육 시간이 되면 놀라운 일들이 생깁니다. 축구 잘하는 친구들이 수비로 빠지고, 평소에 후보 선수였거나 수비했던 친구들이 공격합니다. 경계 너머의 자리에서 마음껏 뛰놀고 골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음악회를 할 때도 경계가 허물어지는 체험을 합니다. 보통 음악회를 하면 노래를 잘하거나, 악기를 잘 다루는 친구들만 참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도 그중에 하나였고 음악회는 구경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기 중에 몇 명이 가을 음악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모아서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음치들’이라고 이름을 짓고 두 번 참여했습니다. 처음 참여했을 때는 2부로 구성된 노래를 했었고, 3학년 때는 아카펠라도 했었습니다. 관객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음악적인 재능으로 놀라움과 감동을 주지는 못했지만, 많은 신학생에게 웃음을 줬습니다. 또 음악적 재능이 없는 친구들도 음악회에 함께 참여해서 어우러지고 일치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거리극이라는 학년별 연극도 있었는데 그때도 끼가 있고 재주 있는 친구들만의 무대가 아니었습니다. 저같이 아무 재주가 없는 친구들에게도 역할이 있었습니다. 연기를 못하는 저에게 주어진 배역은 연극의 ‘시작과 끝’을 외치는 겁니다. 7년 내내 그 역할을 맡았고, 마지막에는 박수도 받았습니다.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로 공부 잘하는 친구 혼자 공부를 마치고 끝내지 않습니다. 공부를 먼저 끝내면 내용을 설명하는 작은 모임이 있기도 했습니다. 1등을 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함께 배우고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경계 밖의 친구들을 챙기는 마음일 텐데요,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경계 밖에서 일을 찾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는 이들을 울타리 안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후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공동체는 어떨까요?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내 것을 주장하며 경계의 벽을 높이 세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후하고 넉넉하게 베풀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습니까?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3-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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