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은망덕한 자녀들인 우리
부모 된 입장에서 자녀들로부터 들었을 때 가장 큰 상처가 되는 말은 아마도 이런 말이 아닐까요. “부모가 돼서 그동안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이런 말 들었을 때 참으로 기가 차지도 않겠지요. 갓난아기 때, 인간도 아닌 그 핏덩이, 하루 온종일 옆에 붙어서 금이야 옥이야 감싸주던 시절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서너 살 때 기억나실 것입니다. 불안해서 어디 내놓을 수 없었던 천덕꾸러기, 늘 노심초사하면서 따라다니던 일이 주마등같이 기억 속에 지나갈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던 때, 한밤중이건 새벽녘이건, 들쳐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던 일…. 그런 일들 안다면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못할 텐데…. 정말 배은망덕이 따로 없습니다.
이런 배은망덕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안에서도 똑같이 되풀이됐습니다. 자비 충만하신 하느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여러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뽑으실 때 뭐가 특출해서, 아니면 대단해서 뽑으신 것일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불쌍해서, 가련해서, 안쓰러워서, 안타까워서 뽑으셨습니다. 그 측은한 존재 이스라엘, 너무나 보잘것없어 ‘벌레 같던’ 이스라엘이었지만 과분하게도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감싸고 어루만져주면서 그렇게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 귀염둥이 딸이 슬슬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빗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가서는 안 될 길, 죽음의 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하느님께서는 심부름꾼을 보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애타는 마음이 담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제발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다시금 너와 내가 맺은 첫 계약을 기억하라고, 첫사랑으로 돌아가자고.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보내신 심부름꾼을 그때마다 족족 매질하고, 폭행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이런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에 이루어졌었던 배신의 역사, 반역의 역사는 어쩌면 오늘 우리 각자의 역사 안에서도 똑같이 되풀이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과분하게도 하느님께서 나를 생명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미물 같던 나를 애지중지 돌봐주셨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아무 상관 없는 나를 지속적으로 살려주시고 동행해주셨습니다.
처음의 나를 생각하면, 이끌어주신 하느님을 생각하면, 앞으로 살아갈 삶의 정답이 바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평불만 할 일 하나도 없습니다. 소작인들처럼 잔머리 굴릴 일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남의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그저 과분하게 생각하면서, 그저 기뻐하면서,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는 소작인입니다.
그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그 신뢰한다는 것이 참 힘든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세상이 하도 흉흉하다 보니 사기꾼들도 많아지고, 서로를 속이고 이용해야 살아남는 세상이다 보니 일단 한번 의심해보는 풍조가 보편화된 듯합니다.
이런 풍조는 예수님 시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선량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끊임없이 현혹시켰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의 타락과 착취는 백성들을 불신과 의심, 불안의 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조차도 거부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그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 특히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일생일대를 건 도박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에는 정확한 목표선택과 그 목표를 향한 전력투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강한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한 확고한 신앙, 그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근본적인 조건입니다.
유다인들이 저지른 과오 중에 가장 큰 과오는 가장 값진 보물이 자신들의 손안으로 굴러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물을 절벽 밑으로 멀리 던져버린 행위였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고대해왔던 메시아, 자신들을 죄와 악에서 구해줄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코앞에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형에 처한 사람들이 바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죽어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교만함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재물이나 권세, 명예에 눈이 단단히 먼 사람들입니다. 가끔 밑으로 내려가 인생의 밑바닥 체험도 기꺼이 할 줄 알아야 되는데, 끝도 없이 올라가려고만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메시아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데, 천국 문이 바로 우리 일상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있는데, 우리의 눈이 너무 높기에,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너무나 물질만능주의,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단순한 사람, 소박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 소작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단 한 번 뿐인 인생을 잘 좀 가꾸어보라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 보라고 임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임대 기간이 결코 영속적이지 않고, 길어야 90년, 100년입니다.
악한 소작인들처럼 분수 넘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인 행세를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나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종이면서 주인인 양 큰소리 뻥뻥 치고 행세하다가 큰 코 다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악한 소작농처럼 처신하다가는 하느님의 강력한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겸손하게, 늘 신중하게, 늘 종이나 소작농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갈 일입니다. 나를 내 삶의 주인이요 주인공으로 여기고, 가슴을 딱 펴고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