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시는 말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당신께 드리는 응답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신앙의 빛」 8항)
■ 왜 우르를 떠났을까?
창세기의 아브라함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믿음의 조상, 하느님으로부터 이사악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던 일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모습들이 있습니다. 분명 아브라함은 하느님께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창세 22,12)
그런데 그는 왜 자신이 살고 있던 곳을 떠났을까요? 그는 우르와 하란에서 거주했었는데(창세 11,31;15,7)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고대 도시로서 당시 융성한 문화를 꽃피운 인류 최초 문명의 발상지이고, 하란은 고대 중동의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물론 그가 떠난 이유는 하느님의 부르심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대 유다 전승은 아브라함이 떠난 이유는 그 지역에 만연한 잘못된 우상숭배 때문이었음을 언급합니다.
■ 참된 진리를 선택했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과감히 떠났던 잘못된 종교와 우상숭배란 무엇일까요?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바치는 광신적 제의, 풍산과 풍요에만 집착하는 신앙, 사람마저 제물로 바치던 인신 제사가 아니었을까요? 실제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종교 풍습은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 때까지도(기원전 587년 경) 근절되지 않던 악습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오랜 세월 지내던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무척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떠남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형제애, 올바른 윤리와 신앙,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 등입니다. 달리 말해 하느님께서 일러 주시는 진리, 영적인 생명, 참된 자유입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아브라함의 모습은 인간과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 하느님께 대한 믿음
나날이 물질적으로 발전하는 현대 사회이지만 여전히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이웃사랑과 형제애, 사랑과 봉사가 줄고 있고,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합니다. 그 이유는 영적 가치와 생명존중 사상의 약화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과 사회의 참된 발전에 필요한 것은 영성 생활에 대한 관심, 하느님께 대해 갖는 신뢰와 진지한 성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친교,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대한 믿음, 사랑과 용서, 극기, 다른 사람들의 수용, 정의와 평화에 대한 관심입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진리안의 사랑」 79항)
여러분들은 공감이 가시는지요? 그럼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엇을 해야 나와 우리 사회가 건강해질까요? 가장 먼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그분의 가르침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먼 옛날 아브라함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자녀들의 아낌없는 응답과 수용을 요구한다. 믿음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며, 인간은 믿음을 통하여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자유로이 맡기며, 자기 형제자매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과 흔들리지 않는 희망으로 하느님께서 먼저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사랑에 응답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9항 참조)
이주형 요한 세례자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