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가난한 이들과 배척받는 이들을 돌보는 데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모든 연령대와 각계각층의 그들은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이해하고 기꺼이 도우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초인적 영웅이 아니라 ‘이웃집 사람’, 곧 스스로 묵묵히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저 무엇을 주는 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경청하고, 관계를 맺으며,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원인을 이해하고 대처하고자 노력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 모두가 평등한 우리
얼마 전 어린이들과 나눈 대화입니다. 제가 질문했습니다. “얘들아, 사람은 왜 겸손해야 할까?” 어떤 아이는 겸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고, 또 어떤 아이는 한 번도 그런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학업에 바쁜 요즘 아이들이다 보니 그러려니 했는데, 그때 한 친구가 “누구나 평등하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무척 좋은 답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니까 모두가 귀한 존재이고 가난하든 부유하든 인간으로서 존중을 받아야 하고 존중해 주려면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의 강요에 의해서였을까요? 고맙게도 아이들도 그 이야기에 공감한다고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희생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사회교리 원리 중 ‘공동선의 원리’가 있는데 그 뜻은 무엇입니까?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신 예수님처럼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가련한 이라도 말이지요. 이것은 또 다른 사회교리 원리인 ‘인간존엄’에서 기인합니다. 다만, 우리가 겸손해야 실천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실천에 동반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희생과 불편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마르 8,34)고 하셨고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는 하나뿐이다. 십자가 이외에 하늘에 오르는 다른 사다리는 없다”고 합니다.(518항) 풍요로운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 하느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11월 19일은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기억하고 사랑을 실천할 것을 더 굳게 다짐하는 날입니다. 1967년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정의평화위원회’를 설립함으로써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정의를 모든 곳에서 증진하고 신자들과 신앙공동체를 일깨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구에는 의무적으로 정의평화위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결국 우리의 실천을 요청합니다.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불편함과 수고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 이것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는 희망 때문입니다.(마태 19,29 참조) 그 약속을 따라 우리도 우리가 믿는 바를 실천합시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부자는 자신이 소유한 것의 관리자일 뿐이며, 재화는 그것을 나누어주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므로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은 겸손하게 수행해야 할 임무라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만 부를 소유하는 이는 죄를 짓는 것이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빚을 갚는 것과 같다.”(「간추린 사회교리」 329항)
이주형 요한 세례자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