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요한 세례자
어떤 신부님의 강론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화가가 바람을 그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갈대밭 길을 산책하게 됐습니다. 갈대들을 보며 산책하던 그 화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서 붓과 스케치북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바람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화폭에는 좌우로 그리고 위아래로 흔들리는 갈대들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화가는 갈대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것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바로 주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있음을 볼 수 있겠죠.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만들었던 키아라 루빅이라는 분은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에 성경이 다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고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도록,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을 평생 삶으로 살아냈던 사람이 바로 요한 세례자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라고 질문합니다. 이에 요한 세례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세례자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평생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일을 했습니다. 곧 사람들이 회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설교하고 세례를 베푸는 일입니다.
그와 같이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일
신학교에서 살다 보면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살다 보니,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또 매일 반복되는 기도나 공부나 운동 때문에 지루함을 느끼기도 하는데요. 그렇게 갈등이 있는 채로, 또 지루함을 느끼면서 신학교에서 살려니까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성 지도 신부님께 그런 이야기를 드렸더니, “감사하면서 살아보라”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면서 살기 시작했는데요.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또 매일 반복되는 기도나 운동이나 공부도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것에 맛을 들이면서 살다가, 하루는 강론 연습 시간에 동기 신부의 강론을 듣게 됐습니다. 그 친구는 소록도 할머니의 얘기를 들려주다가 끝에 테살로니카 1서 5장 18절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큰 감동이 있어서 성당에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하는 것이 작고 보잘것없는 일이고 나를 위한 일인 줄 알았는데, 말씀대로라면 감사하는 것만으로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니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 ‘내가 평생 할 수 있는 일은 감사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흔히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문제만 사라지면 감사할 수 있을 텐데. 이 고비만 넘기면 감사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루카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명의 나병환자에서 보는 것처럼, 감사는 상황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 중 아홉 사람은 자신의 문제가 극복됐는데도 불구하고 감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도 부끄럽지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일 아침에 주임신부님과 사무장님, 그리고 관리장님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리카락 얘기가 나왔는데, 저는 머리를 자르고 다듬고 손질해야 하는 것이 무척 번거롭고 귀찮아서, 주임신부님께 ‘저는 대머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머리가 되면 다 밀어버리고 다니면 되니까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대머리이신 분들의 고충을 모른다며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대머리 되면 어떤 줄 알아? 머리에 상처 나지. 햇볕 뜨거우면 화상 입지. 얼마나 힘든데. 하여튼 있는 놈이 더 한다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대머리이신 분들을 유심히 보니까, 실제로 머리에 상처도 많이 있으시고 햇볕이 뜨거운 날은 머리가 벌게지며 약간의 화상도 입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니, 머리숱이 많은 것을 30년 만에 처음으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가진 것을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있는 놈이 더 해’라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즈음에 주님이 베풀어 주신 축복과 은총을 되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