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公顯)은 에피파니(Ephiphany)의 번역어입니다. 성스러운 존재 혹은 신적인 존재가 세상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에피파니입니다. 따라서 ‘주님 공현’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아주 오래전(기원후 4세기)부터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 세상에 드러나신 날을, 이방인으로 알려진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으로 이해하고 1월 2~8일 사이 주일을 대축일로 기념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묵상할 복음은 마태오 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의 방문 이야기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별이 내는 빛을 따라온 것입니다. 빛은 진리를 의미하기에 그들은 진리를 찾아 예수님께 온 것입니다. 오로지 빛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온 이들을 보면서 진리를 향한 열정이 얼마나 크기에 이렇게 무턱대고 길을 나서서 멀리까지 올 수 있었나 하며 감탄해봅니다.
동방박사들이 빛을 따라오다가 예루살렘에서 만난 이들은 통치자인 헤로데, 백성의 수석 사제, 율법학자들입니다. 권력, 명예, 학식, 도덕성 등을 갖춘 사회적, 종교적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동방박사의 방문에 매우 놀랍니다. 아마도 이들은 그 빛을 본 적이 없거나 혹은 빛에 관심 없이 살아온 자들이기에 빛을 보고 여기까지 온 이방인들에게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빛 즉 진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 놀란 또 다른 이유는 동방박사들이 ‘유다인의 왕’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권력과 명예에 관심이 큰 이들이기에 만약 새로운 왕이 나타난다면 큰 위협으로 느껴져서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부랴부랴 메시아가 태어날 곳을 찾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의 어느 누추한 집에 있는 아기와 아기의 부모를 만나면서 진리를 찾아 나선 여정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들은 이곳에 다다라서 실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대단한 진리를 찾아 나섰기에 그들은 어떤 현자를 만나서 자신들이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뛰어난 가르침을 듣는다든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다른 위엄을 지닌 통치자를 만나 그에게서 세상을 구할 희망을 발견하는 기대와 상상을 하고 길을 나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이 자신들의 상상과는 너무도 다른, 누추한 곳에 누워있는 아기에게로 자신들을 이끌었으니 크게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고정관념으로 진리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겸손하게 자신들이 가져온 가장 고귀한 예물을 아기 예수님에게 봉헌합니다. 자신들이 찾았던 진리가 그 아이를 통해 세상에 드러날 것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전합니다. 먼저, 나는 진리를 찾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복음에 나온 동방박사의 태도는 진심으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신앙을 갖고 사는 삶은 나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신앙 없이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신앙을 갖는 이유는 진리를 체험하고 그로 인해 내 삶을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진리는 하느님이십니다. 진리를 찾는 이는 하느님을 찾는 이며 내 삶을 하느님 중심으로 바꾸어 가는 사람입니다. 복음에 나온 동방박사가 보여주듯 진리를 찾는 이는 내 가치와 기대에 맞는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삶의 여정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과연 진리를 찾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진리에 대해 공부하면서 나의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일까요? 복음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예수님께서 세상에 드러나는 사건이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질문도 던집니다. 곰곰이 묵상해보면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고 체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로 인해 세상에 드러나신 것이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예수님의 탄생도 하느님이 기적을 일으켜서 홀로 사람이 되신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초대에 협력한 마리아와 요셉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성탄과 공현은 하느님이 당신의 구원 역사에 인간을 초대하고 그들과 함께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며 두려움 속에서도 성령에 의한 잉태에 ‘예’라고 응답하신 마리아, 자신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마리아와 뱃속의 아이를 위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고 길을 함께 간 요셉이 하느님의 초대에 함께 했기에 ‘말씀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단지 귀여운 아기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아이들을 학살하는 냉혹한 세상에 오시는 것이며, 그럼에도 그 냉혹한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진리를 찾아 나선 이들의 열망과 협력 안에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 속으로 육화(肉化)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상상하고 기대한 능력과 권위를 갖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비천한 처지에 있는 연약하고 무기력한 아이의 한계를 갖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이 인간의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서막일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모든 것을 비우고 초라하게 오신 예수님과 그분이 오실 수 있게 순박한 믿음과 겸손으로 자신의 인생을 봉헌한 사람들, 구원의 진리를 갈망한 이들이 함께 협력하면서 시작됩니다. ‘주님 공현’은 너무도 아픈 일이 많이 벌어지는 ‘이 세상에서 주님이 드러나시도록’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를 기도하고 삶으로 실천하도록 초대합니다.
※ 현재우 박사는 서강대학교에서 이냐시오 영성과 유교를 비교하는 주제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서강대, 수원가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한국 CLC 회원이며 한국교회사연구소와 한국천주교평신도단체협의회 산하 평신도사도직연구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우 에드몬드
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