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하와는 카인과 아벨 두 형제를 두었다. 성경은 영화대본처럼 스토리가 일사천리로 전개된다. 물론 문장의 행간(行間)에는 수없이 많은 고뇌와 걱정,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내 경우 세 살 터울인 동생이 태어나고 난 후 동생과 많이 싸웠다. 싸움의 이유는 이념, 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자체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마루에서 매일 저녁기도를 바쳤다. 우리 둘은 맨 뒤에서 몸을 배배꼬면서 있다가 눈이 마주치면 “뭘 봐! 임마”하며 서로 잡고 뒹굴며 싸웠다. 나와 동생의 싸움이 끝난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보통처럼 동생에게 주먹을 날렸는데 동생이 맞기만 하고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형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수십 년간 말다툼 한번 한 적도 없다.
카인은 유목민, 아벨은 정착민으로 추정되는 두 계급은 사는 방법과 문화가 전혀 달랐을 것이다. 봉헌 이야기는 폭력의 이유에 대해 좀 더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을 제공한다. 하느님은 카인의 제물은 거부하시고 아벨의 것만 받으셨다. 카인이 바친 예물은 굳이 원문으로 보면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바치는 예물이며 맏배가 아니었다. 반대로 아벨은 원칙대로 맏배와 함께 자기 자신도 봉헌했다. 카인에게는 동생에 대한 하느님의 편애(?) 때문에 생긴 질투심 등 자신도 이해 못할 감정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카인이 가장 섭섭한 것은 사실 하느님이지만 자신의 화풀이 대상으로 비겁하게 약한 동생으로 표적을 바꾸었다. 카인의 분노, 섭섭함, 창피함 등 여러 감정들이 대폭발을 일으켜 결국 아벨을 죽인다.
하느님이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하신 질문은 아벨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 카인의 양심의 문을 두드리시는 것이다. 이때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카인은 죄를 부정한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왜 그것을 저에게 물어보십니까?”
우리 마음 안에는 사실 카인과 아벨의 모습이 어느 정도 내재해있다. 우리나라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보다 내가 잘 알고 속으로는 나보다 못한 점도 많은 것 같은 사촌이 땅을 샀다고! 정신적으로 느끼는 현타(?)는 실제 몸에도 슬슬 나타난다.
분명히 죄라고 하는 상황은 오늘날 우리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카인이 낙원에서 쫓겨난 죄의 결과는 ‘하느님께로부터 이탈’이며 결국 죽음이다. 질투는 모든 인간이 갖는 보편적 특성이다. 이것도 성장하면서 훈련을 통해 성숙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주님은 한 번의 잘못으로 내치는 분이 아닌 자비로운 분이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약속한다. “다른 사람들의 위협에서 보호하겠고 표를 찍어 어느 누구도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
“행복의 문이 하나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열린 문을 보지 못하게 된다.”(헬렌 켈러)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