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하면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2016년 방영된 ‘도깨비’에는 많은 명대사가 있는데, 그중 “너와 함께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대사가 기억에 오랫동안 남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문’을 통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신기한 모습을 자주 연출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은 ‘내가 여는 문을 통해 내가 원하는 공간으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환상을 꿈꾸기도 하지요.
문은 여닫는 기능을 통해 연결과 분리, 그리고 환영과 거부를 할 수 있습니다. 건물의 용도에 따라, 공간의 활용 방법에 따라 문은 다양하게 설치됩니다. 예를 들면 휠체어를 타는 분들을 위해서 화장실 문을 여닫이가 아닌 옆으로 밀게 하는 미닫이로 만들어 쉽게 들어가고 나오게 하지요.
성당 문은 ‘속’(俗)에서 ‘성’(聖)으로 들어가게 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당 문은 바깥과 안 사이에, 장터와 성역, 세속 것과 하느님께서 축성한 것 사이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저명한 신학자인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는 「거룩한 표징」에서 우리가 성당 문을 지나갈 때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안에 속하지 않는 것은 생각, 근심, 걱정, 호기심, 허영 할 것 없이 모두 밖에 놓아두고 들어오시오. 성역에 들어오는 만큼 자신을 정화하시오.” 그래서 문을 부산하고 급하게 들어가기보다는 침착한 걸음으로 마음을 차분하게 하여 조심스럽게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성당 문을 공식적으로 처음 들어가시는 분은 주교입니다. 주교는 성당 봉헌 예식을 거행하기 전에 하느님 집의 문을 주교 지팡이로 두드리며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내게 들어오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시편 24,9)의 시편 24장을 노래합니다.
성당 문은 사람을 바로 하느님의 신비로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의 신비를 실제 사건이 되게 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공간에 들어와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과 청원을 드리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거룩함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신앙인은 성당 문을 통해서 들어가 다양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성령 안에서 받는 성사 생활을 하다가,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위령 감사송 1)이라는 죽음을 맞이한 후에 시신이 되어 나가는 곳도 성당 문입니다. 곧 성당 문은 생과 사가 드나드는 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당 문을 들어서면서, 먼저 열어야 하는 문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 마음의 문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와 세상의 여러 잡다한 소리로 인하여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여 그분께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산 거처인 ‘성령의 성전’(1코린 6,19)이 못되면 나무와 돌로 쌓은 성당 문에 들어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높고 묵직한 성당 문을 열어본들 우리 안의 문이 안 열려 영광의 임금께서 들어오지 못하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
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