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연중 제4주일을 보내는 우리를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카파르나움으로 초대합니다. 그곳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이 있는 곳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활동하던 도시였습니다.(마태 8,5; 11,23; 루카 7,1; 10,15 참조)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는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벌어진 사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지난 주일 복음(마르 1,14-20)에 이어지는 이야기, 곧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첫 번째’ 사건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그곳에 있던 회당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보시고 그 안에 있던 마귀를 쫓아내시어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는 구마 기적을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있는데(1,27 참조), 이로써 서로 다른 두 개의 사건, 곧 예수님의 가르침(1,21-22)과 구마 기적(1,23-26)이 하나의 이야기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사건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1,22.27)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문학적 구조는 이어지는 마르코의 예수 이야기에서 종종 등장하고 있습니다.(다른 예, 마르 2,1-12; 3,20-35; 4,10-12; 5,21-43; 11,11-21; 14,1-11)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보여주신 ‘첫 번째’ 활동을 통해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1,22.27 참조), ‘권위’는 예수님을 율법학자들과 구별하는 잣대가 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소유하시는 ‘권위’는 세상의 창조주로서 가지는 절대적 권한과 권능을 말하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위’를 통해 세상에 대한 절대적 왕권을 가지고 세상을 영원히 통치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아들’(1,10-11)인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았고, 위임받은 신적 권위를 가지고 하느님의 나라와 그 복음을 선포하십니다.(1,15) 예수님의 ‘권위’는 공적 활동, 곧 가르침과 기적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이로써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통치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속한 자로서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에 대한 예고는 앞서 구약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의 뒤를 잇는 예언자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신명 18,18) 신명기 저자는 예언자의 자격과 역할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모세의 후계자로 뽑아 세우신 사람으로서(신명 18,15.18),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신명 18,19-20)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신명 18,15)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하느님의 추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신명 18,19) 후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신명기 18장 18절의 말씀(“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을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에 큰 예언자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해석했는데,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오늘 주일의 독서와 복음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어부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후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기적행위를 보여주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어지는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시면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고자 하시지만, 제자들의 눈은 가리워져 있습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가던 중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지만(마르 8,30), 베드로 역시 완전한 신앙 고백의 차원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제자들의 몰이해는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깨달음에 한계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마르코 복음 전반에 걸쳐 예수님은 계시되면서도 감추어져 있는 존재, 곧 ‘신비’(그리스어 ‘미스테리온’)로 소개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가 온전히 드러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마르 15,39 참조)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이 ‘십자가의 무력함’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을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카파르나움으로 갔지만, 그곳에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놀라움을 표현했던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표현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카파르나움의 회당으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