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을 오직 ‘나병’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한 단어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도 사람이므로 얼굴이 있고 이름이 있었을 텐데, 복음은 오직 이 단어로만 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병’. 종이 위에 가만히 말라붙어 있는 이 한 단어 너머에는 얼마나 사연이 있을까요. 과연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요.
율법의 이름으로 추방된 삶
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의 율법을 들여다봅니다. 구약 율법에는 ‘악성피부병’에 대한 규정(레위 13-14장; 신명 24,8)이 있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악성피부병이 나병이 아니라, 전염성을 가진 피부병을 통칭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피부병이 나병은 아니지만, 나병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모든 피부병을 나병처럼 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규정에 따라 사제는 환부를 살펴본 뒤에 악성피부병으로 진단하고, 그를 ‘부정한 사람’으로 선언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환자로 선언된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마을 밖에서 살아야 했고,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지요. 자신이 피부병 환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옷을 찢어 입고 머리는 풀어헤쳐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다가오지 못하게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치거나,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으면 작은 방울이라도 울리고 다녀야 했다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악성피부병을 ‘짜라아트’라고 불렀는데요, 이 말은 ‘매질하다’, ‘때려눕히다’는 뜻의 ‘짜라’에서 나왔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성피부병을 죄에 대한 하느님의 형벌이라고 여겼던 거지요.
그들의 삶을 상상해봅니다. 어느 누구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을 텐데, 얼마나 그리웠을까요.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허물어져 가는 몸으로 땅을 일굴 수는 있었을까요. 구걸도 사람을 만나야 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밥을 먹고 살았던 걸까요. 사제는 율법을 받들며 그를 부정한 사람으로 선언했습니다. 아픈 것만으로도 슬프고 고통스러운데 그들은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시달렸겠지요. 그는 하느님께 어떤 기도를 올렸을까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감염병이었고, 자연적으로 치유되지 않으며 게다가 당시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으니 그렇게 공동체로부터 ‘격리’하는 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해석과 입장은 당연한 것이나 무척이나 아픕니다. 정말 그것이 ‘격리’가 맞았을까요. ‘추방’이나 ‘방치’, ‘사회적 매장’이 아니었나요. 건강한 사람들을 살리겠다고 아픈 사람을 혐오의 대상으로 내모는 일은, 건강한 생각인가요. ‘나병’이라는 낱말 너머에 그려지는 그 삶을, 그 마음을, 그 아픔을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율법이 버린 이와 율법을 뛰어 넘은 마음
다시 복음을 마주합니다. 나병 환자가 먼저 예수님께 ‘다가왔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율법이 엄금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이미 율법을 버렸습니다. 아니 율법이 먼저 그를 버렸습니다. 그는 추방당했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율법에 기대지도 매달리지도 않습니다만, 그에게는 율법이 할퀸 상처는 남아있습니다. 그는 고쳐달라고 하지 않고 깨끗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손을 대십니다. 우리 손을 가로막는 것들이 있습니다.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고, 율법에 대한 경외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움이든 경외심이든 우리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건 간에 모든 것을 뛰어넘어 버리는 마음도 있습니다. 복음은 그것을 ‘가엾은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은 금기와 혐오를 넘어 누군가의 아픔에 다가갈 때 가능한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의 아픔을 먼저 돌보신 다음 어떤 화해를 시도하십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것은 율법과의 화해이기도 하고, 공동체와의 화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화해의 거부였을까요. 해방이었을까요. 마침내 그는 입을 열어 자신의 이야기를 알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이야기는 복음의 일부가 되어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픔이 혐오가 될 때
나병은 질병 그 자체로 아픔이겠지만 그 아픔에 대한 혐오로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나병은 치료가 가능하므로 예수님 시대의 나병처럼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픔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일은 계속 반복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핵 요양원 이전을 반대하여 요양원이 산언저리까지 밀려났다는 이야기. 주민들이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해서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는 신문기사. 정신병리와 중독에 시달리는 이들에 대한 시선. 이주민과 외국인노동자들. 소수자들과 차별에 시달리는 사람들. 우리 신앙은 이러한 아픔을 어떻게 돌보고 있나요. 우리 신앙은 또 다른 혐오를 빚어내고 있지 않나요. 무엇보다 나병 환자의 삶을 추적하는 마음으로 그 아픔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요. 바로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을 조금 더 닮게 되지 않을까요.
전형천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국내연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