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추운 기운이 물러나고 봄이 다가오면서 많은 분들이 성지순례를 다녀오셨거나 계획하고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사순 시기인 요즘은 성지순례 중 십자가의 길을 바치기 참 좋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은 우리나라에는 성지(聖地)가 없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주교회의 순교자현양과 성지순례사목 위원회가 펴낸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에는 전국 곳곳의 성지가 167곳이나 있습니다. 또 이 책에는 모두 실리지 않았지만, 각 교구에서 성지로 부르는 곳들도 더 있습니다. 그런데 “성지가 없다”니 이상하게만 들립니다.
먼저 성지(聖地, terra sancta, holy land)라는 말의 의미를 찾아봐야겠습니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은 성지를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 생활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땅인 팔레스티나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정의합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오신 적이 없으니 우리나라에 성지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성지’라고 부르는 곳들은 어떤 곳들일까요.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순교자들이 순교한 곳, 순교지를 ‘치명 터’라 불러왔습니다. 순교지를 성지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56년 세웠던 새남터 순교 기념탑이 계기가 됐습니다.
새남터 순교 기념탑에는 순교지인 새남터를 성지(聖址), 바로 ‘거룩한 터’라고 표기했습니다. 거룩한 땅이라는 의미의 성지(聖地)와도 구분되면서 ‘치명 터’의 의미도 담은 용어였습니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도 성지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보편교회에서도 예수님의 삶과 수난을 상기시키는 장소, 성인들의 순교지나 묘소, 성모발현지 등을 거룩한 장소(loci sancti, holy place)라고 성지(聖地)와 구분해 불러왔습니다. 우리말로는 발자취, 자리, 터라는 뜻의 지(趾)를 사용해, 성지(聖趾) 혹은 성역(聖域)이라고 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글의 전용화로 성지를 한글로만 표기하면서 거룩한 땅을 뜻하는 성지(聖地)와 치명 터를 일컫는 성지(聖址)를 혼용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순교지가 아닌 곳들도 성지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성지’라고 부르는 곳들은 교회법적으로 ‘순례지’(Sanctuariis)에 해당합니다. 교회는 신심 때문에 빈번히 순례하는 성당이나 그 밖의 거룩한 장소를 교구 직권자의 승인을 통해 순례지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교회법 제1230조) 국가 순례지의 경우 주교회의가, 국제 순례지의 경우 교황청이 승인하게 됩니다.
주교회의 순교자현양과 성지순례사목 위원회는 우리나라의 성지를 크게 3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성인·복자·하느님의 종이 순교한 곳이나 무덤이 있는 곳 중 지속적으로 전례가 이뤄지는 곳은 ‘성지’(聖趾), 국내 순교자들과 연관 있는 장소들은 ‘순교사적지’, 순교자들과 관련이 없지만 신앙선조들의 삶과 영성이 담긴 곳, 또는 교구 직권자가 순례지로 지정한 곳은 ‘순례지’입니다. 그냥 떠나는 성지순례도 좋지만, 내가 가는 곳이 어떤 의미를 지닌 성지인지 알아보고 순례한다면 성지순례에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