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년 겨울, 잉글랜드 요크에서 14명의 노동자가 반란 혐의로 교수대에 올랐다. 방직 산업의 급격한 기술 혁신이 오히려 노동자들의 삶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있던 때였다. 숙련은 존중받지 못했고, 임금은 추락했으며, 생계는 흔들렸다. 급진적 노동운동이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를 부수는 파괴적인 저항으로 알려진 ‘러다이트 운동’도 그 하나다. 흔히 무지한 폭도들의 반란으로 묘사되고는 했지만, 역사학자 E. P.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이를 새롭게 읽었다. 그것은 단지 기술에 대한 증오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쌓여온 삶의 균형, 스스로 삶을 규정하는 힘이 파괴되며, 자신들의 생활과 존엄을 아무 가치도 없게 만드는 질서에 대한 ‘도덕적 저항’이었다.
200년이 지난 오늘, 노동 현장은 방직기에서 반도체 클린룸과 데이터센터로 바뀌었다.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이 미래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떠들썩한 시대, 한국 사회는 AI와 반도체를 국가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막대한 자원을 쏟아붓고 있다. 거대한 산업 단지가 곳곳에 들어서고 초고압 송전선로가 농어촌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데이터센터의 불빛은 종일 꺼지지 않는다. 욕망과 눈물이 함께 떨어지는 풍경이다.
효율과 경쟁력이 지상과제가 되고, 주식과 AI가 성장의 상징이 되면서,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지역 공동체의 삶, 환경의 착취, 에너지 자원의 과다 소비 같은 생존과 보호의 문제들은 배제되었다. 온갖 종류의 특별법과 육성 정책은 사적 기업의 위험을 공공이 떠안는 ‘디리스킹(De-risking) 국가’ 기제로 전락하고, 생명과 생태의 가치는 사라졌다.(김상현, 「반도체·AI 신드롬에 짓밟히는 노동과 생태」, 창비주간논평)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살만한 미래를 상상한다면, 과잉과 남용을 피할 수 없는 성장 방식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 집어삼키려는 욕망이 우리를 온전하고 충만하게 살게 하겠는가? 사회·생태적 책무를 요구하는 것은 발전을 지연시키는 장벽이 아니라, 발전을 인간화하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다.
특히 노동은 단순히 생산과정의 한 부분이 아니다. 노동은 인간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방식이며, 창조에 협력하는 행위이고, 공동체를 세우는 사건이다. 이를 비용으로만 환산하는 체제는 경제적으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왜곡된 질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듯이, 노동은 ‘존엄으로 가는 통로’이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에 속하며, 성장과 인간 발전과 개인적인 성취로 가는 길’이다.(「찬미받으소서」, 128항) 노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움직이게 하는’ 통로다.
러다이트의 처형대와 데이터센터의 불빛은 시간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공통의 질문이 있다. 노동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기술의 변화는 누구의 삶을 지우는가. 자본의 막대한 이익은 누구에게 가는가. 사회적 삶의 재구성도 근본적으로는 ‘회개’의 요청이다. 회개란 방향을 바꾸는 행위다. 속도를 늦추고, 기준을 다시 세우며, 목적을 다시 확인하는 영적 결단이며, 노동과 기술을 관계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는 영적 용기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고, 노동이 존엄을 드러내며, 창조 세계가 선물로 존중받는 질서로의 전환은 거창한 전략 선언을 믿는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타자의 자리를 더 존중하고 욕심을 더 묻어놓는 마음에서, 그리고 우리의 양심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선택은 기계의 새벽이 아니라, 인간의 새벽이다. 그 새벽은 정의를 향한 결심, 연대를 위한 발걸음, 전환과 회개의 용기 속에서 비로소 떠오른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