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사목은 이주민들을 향한 사목적 돌봄을 수행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지만, 단순한 사목적 돌봄을 넘어 때로는 이주민을 환영하고, 만나고 또 그들의 어려움을 듣고 도와주는 일들도 하게 된다. 영성적인 도움만이 아니라 법률적, 물질적 도움도 주어야 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중의 하나가 당장 갈 곳 없는 이주민들이 머물 수 있는 쉼터이다.
쉼터의 목적은 갑자기 실직하였거나 치료의 목적으로 단기간 머물 곳이 필요한 이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동안 다양한 국적에, 다양한 사정으로 많은 이가 거쳐 갔다.
혼자 지내는 것이 아니라 보통 2~3명의 낯선 이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 따라서 공동생활 안에서 요구되는 규칙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 잠시 지내다 떠나는 곳이지만, 공동체 생활이기에 각자 곤궁한 사정의 경중을 따지기에 앞서, 함께 지내기 위해 자기희생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안타까운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난민 인정을 희망하며 체류하는 어떤 이주민이 쉼터에 왔다. 쉼터에는 이미 다른 국적의 이주민 두 명이 있었다. 함께 지내기 위해서는 쉼터에 마련된 식기와 식재료도 공유하고 요리도 직접 해야 하며, 청소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관리자나 봉사자 없이 그들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쉼터에 온 후 스스로 요리도, 청소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다 덩치가 큰 그는 함께 지내는 이주민들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참다못한 이들이 이 이야기를 담당 사제에게 전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그런 일은 절대 없다며 부인한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도 자신은 그들보다 도움이 더 필요한 처지임을 주장하는 데 열심이다. 어느 쪽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태도에 화가 나서, 결국 그를 곧 쉼터에서 내보내기로 했다. 도움 앞에서는 간절한 모습이지만, 같은 처지의 다른 이들에게는 작은 배려와 희생에도 인색한 사람이라는 의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어디든 사람이 모이면 갈등이 있기 마련이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희생을 당연한 듯 여기고 자신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 같이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인색한 모습을 보면 베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괘씸한 마음이 든다. 약자의 사회 안에서도 벌어지는 약육강식과 이기적인 행태로 보인다.
복음에서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이 뒤돌아서 나올 때 자신에게 빚을 진 동료의 멱살을 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의 마음’(마태 18,23-35 참조)이 그러했을까?
하지만 이런 결정에는 늘 후회와 반성이 따른다. 생각해 보면, 나 또한 받았기에 베풀어야 하는 사람 아닌가. 내가 제공하는 도움은 나의 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명과 소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을 앞세워 처음에 지녔던 따뜻한 시선은 거두고 쉽게 의심과 미움에 사로잡히는 냐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잊어버린 인색한 종’은 아닌가.

글 _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