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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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사순 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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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신부들과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이 식당에서 어느 신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뭐 먹을지를 다른 신부가 묻습니다. 이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아무거나 시켜 줘”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 뒤에 음식이 나왔는데 정말 ‘아무거나’가 나왔습니다. 메뉴판에 ‘아무거나’라는 메뉴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신부는 모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문했지만, 저만 이상한 ‘아무거나’를 먹게 되었습니다.


김치찌개를 먹고 싶은데 된장찌개를 시킨다면 원하는 김치찌개를 먹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원하는 음식이 나옵니다. 이처럼 우리 삶도 똑같지 않을까요? 말로 부정적인 이야기만 한다면 과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까요? “절대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용서의 은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이 곧 하느님께 전달하는 주문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주문해야 할까요?


당연히 자기에게 이로운 것, 진심으로 필요한 것을 주문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문 전에 다른 주문을 먼저 하곤 합니다. ‘이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왜 내 기도만 들어주시지 않는 거야?’, ‘왜 저 사람들은 문제투성이야?’ 등의 다른 주문은 안 됩니다. 제대로 주문해야 합니다. ‘아무거나’를 말하면 정말 ‘아무거나’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제대로 주님께 주문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기에, 라자로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했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인간적인 무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한 11,4)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즉각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르타가 마중 나옵니다. 그녀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라는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4)라고 대답하면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종말론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부활은 먼 훗날의 사건입니다. 이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라고 하시면서, 먼 미래에 일어날 현상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무덤으로 가십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고 마르타가 이야기하지요.(요한 11,39 참조) 당시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 사흘 동안 시신 곁을 맴돌다가 냄새가 나는 나흘째가 되면 영영 떠난다고 믿었습니다. 마르타의 말은 곧 인간적 희망이 단 1도 남지 않은 완전한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절망의 끝자락에서 돌을 치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말씀에 죽음이 굴복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안에도 무덤이 있습니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는 관계, 그 관계 안에서 오래 굳어 버린 상처, 희망이 사라졌다는 기억, 신앙이 식어버린 자리…. 그래서 주님께 제대로 주문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포기하고 절망할 뿐입니다. 혹시 마르타의 말처럼 “주님,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부족하고 나약한 믿음으로 주저하면서 갇혀 있는 우리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리 나와라”라고 외치십니다. 내 안에 있는 무덤을 열고 나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에 고해성사를 보고 회개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잘못 반성에서만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얼른 나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통해, 주님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주님께 주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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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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