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읽어 보았을 동화다. 이 작품은 한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 가는 과정을 나무의 시선에서 비춘다. 아이는 어릴 때 나무에 오르며 놀고, 성인이 되어서는 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고백하며 영원을 약속하는 표식을 새긴다. 이후에는 나무를 베어 자신의 삶에 사용하고, 긴 시간이 흐른 뒤에는 노인이 되어 남겨진 그루터기에 앉아 쉰다. 나무는 아이의 생애 전 과정에서 필요한 것을 제때 내어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 동화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압축해 보여 준다. 나무와 아이의 관계는 철저히 비대칭적이다. 혜택을 제공하는 존재와 그 혜택을 받는 존재가 명확히 구분되며, 그 위치는 끝내 뒤바뀌지 않는다. 이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해석은 갈린다. 어떤 이들은 이를 무조건적 사랑의 상징으로 읽고, 또 어떤 이들은 건강한 사랑이 아니라 착취적이고 병적인 관계로 해석한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을 단순히 선악의 도식으로 판단하기보다, 시간의 흐름과 늙음, 소진과 상실 그리고 인간관계의 슬픔과 모호함을 담아낸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나는 아이와 나무의 관계를 생태윤리적·생태신학적 관계로 읽고 싶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끊임없이 혜택을 얻고, 그 혜택 위에서 생명과 문명을 유지해 왔다. 생태학자들은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이러한 기여를 ‘생태계서비스’라고 부르며, 이를 공급서비스, 조절서비스, 문화서비스, 지지서비스로 구분한다.
나무의 시선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 우리는 생태계서비스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더 근원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은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이 내어주는 혜택 속에서 살아가는 의존적 존재이며, 결국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관계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자연은 인간 삶의 배경이 아니라, 그 삶을 지탱하는 생명의 품이다.
인간의 역사는 자연 전체의 역사, 더 나아가 지구의 역사와 긴밀히 얽혀 있다. 오늘날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졌다. 많은 학자는 지금의 시대를 ‘인류세’라 부른다. 자연이 내어주는 혜택 아래 살아가는 인간은 결코 세상의 주인공일 수 없다. 우리는 전체 자연의 질서와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한 존재일 뿐이다.
미국의 생태학자 알도 레오폴드의 ‘대지 윤리(land ethic)’는 인간이 자연 공동체의 지배자가 아니라 그 안에 속한 평범한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말하는 ‘생태적 회심’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 안에 우리가 깃들어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그 사실을 향해 마음을 돌리는 일이다.
오늘날 첨단기술과 자본이 인간사의 중심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에 앞서 존재했고 인간 이후에도 존재할” 하느님의 너른 품인 자연의 질서 안에 놓여 있다. 나는 이 사실을 철저히 자각하는 것이 생태적 회심의 본질이라고, 또한 이것이 인간 영혼과 문명을 구원하는 궁극적인 길이라 믿는다.
글 _ 박태현 요셉 다미아노(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지구법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