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교회는 성금요일에 마주할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묵상하며 준비한다. 전례 안에서 ‘주님의 수난기’를 듣고, 성지(聖枝)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한다. 이날 성당에서 신자들이 손에 들고 흔드는 성지는 어디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질까. 성지가 우리 손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찾아 제주로 향했다.
성지(聖枝)로 마련한 신앙의 집
3월 20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색달동 편백 숲 일대는 가지를 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30여 명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땀을 한가득 흘리는 고된 일이었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바로 제주교구 효돈본당(주임 정필종 도미니코 신부) 신자들이었다.
본당은 1989년부터 전례용 성지를 만들어 전국의 본당과 기관에 판매하고 있다. 이를 위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열흘 앞두고 사나흘 동안 본당 공동체가 함께 힘을 모아 성지를 준비한다. 이날은 성지에 쓰일 가지를 채취하는 날이었다. 올해는 전국 126개 본당에서 약 12만 개의 가지를 주문받아 더욱 분주했다.
“잎이 빽빽하고, 색이 푸른 편백이 상품이에요. 이런 것만 골라서 가지치기를 해야 돼요. 다 같이 하면 힘들지도 않고, 금방 끝나요.”
40년 가까이 작업해 온 베테랑 신자들의 손놀림이 능숙했다. 질 좋은 가지를 선별하고, 한데 묶어 트럭에 실었다. 힘든 일임에도 분위기가 밝은 이유를 묻자, 작업 첫해부터 참여한 오효현(바오로) 씨는 웃으며 말했다.
“성지 덕분에 성당도 지었고, 하느님 사업에 동참하는 일이니까 힘들지 않아요.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지 판매로 기금을 마련해 성당을 봉헌할 수 있었기에 이들은 늘 감사한 마음으로 성지를 만들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1988년 서귀포본당 소속 공소에서 승격된 본당은 성전 신축 기금 조성을 위해 1989년부터 성지 판매를 시작했다. 당시 초대 주임 윤성남 신부(프란치스코 하비에르·제주교구 표선본당 주임)의 제안이 계기가 됐다.
윤 신부는 과거 서울의 한 수녀가 동대문시장 꽃 판매점에서 편백 가지를 구입해 성지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서울대교구의 다른 본당들도 이렇게 힘들게 성지를 마련하고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후 서울대교구 모든 본당에 성지를 제공하겠으니 성당 건립을 위한 봉헌금을 보내달라는 서신을 보냈고, 이에 응답한 본당들의 봉헌금이 성당 건축의 토대가 됐다. 성지로 성당을 봉헌한 본당은 이후에도 이 일을 이어가며 수익금으로 본당 재정을 돕고, 필요한 곳에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공동체의 축제
3월 21일 제주 서귀포시 하효동의 한 선과장에서 본당 신자들이 한데 모여 작업하고 있었다. 체계적으로 역할이 나뉜 작업 현장에서 신자들은 익숙한 움직임으로 각자의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첫 단계에서는 트럭에서 내린 가지를 선별해 성지로 사용할 크기로 다듬어 다음 단계로 넘긴다. 이어 이를 다시 검수해 10개씩 한 단으로 묶고, 마지막으로 20단을 한 박스에 담아 포장해 배송을 맡긴다.
이날의 풍경은 노동 현장이라기보다 축제의 장에 가까웠다. 작업을 하면서 서로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올해 농사는 어떤지 안부를 묻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준비해 온 다과와 음식을 나누며 흥을 돋우고 있었다.
작업 첫해부터 참여한 신윤자(데레사) 씨는 말했다. “작업하면서 서로를 더 잘 알게 돼요. 교우들 관계도 더 돈독해지고요. 수십 년 동안 이맘때마다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은 이제 식구나 다름없어요.”
이처럼 성지 작업은 단순한 노동을 넘어 공동체의 친교를 이루는 시간이 되고 있다. 오랜 기간 참여해 온 신자들뿐 아니라, 새로 공동체에 들어온 이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대구에서 이주해 올해 성지 작업에 처음 참여한 이현숙(수산나) 씨는 작업하는 동안 신자들과 많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한 식구가 됐음을 체감한다. 이 씨는 “함께 땀 흘리고, 하느님 일에 기여할 수 있어 뿌듯하다”며 “매년 참여할 것”이라고 전했다.
서울에서 온 본당 전입 4년 차 강문영(데레사) 씨도 서울의 지인들에게 성지 만드는 일을 자랑하고 홍보할 정도로 이미 본당과 한마음이 됐다. 강 씨는 “함께 성지를 만들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줄 수 있어 보람차다”고 밝혔다.
정필종 신부는 “성지 작업은 주일학교 아이들도 돕는 일이라, 어르신과 아이들이 자연스레 가족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게 된다”며 “육지에서 온 이주민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신자들과 이주민이 교류할 수 있는 장으로도 역할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지 작업으로 공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묶어온 본당은 이제 새로운 성당 봉헌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거둔 수익금은 본당 관할 위미공소 성당 건축에 보탤 예정이다. 본당은 이를 위한 도움의 손길도 기다리고 있다.
※후원계좌 농협 351-1129-3472-03 천주교효돈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