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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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선을 긋는 공부에서, 함께 앉는 공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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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교과서보다 먼저 세상의 분류표를 읽습니다. 어디에 사느냐가 사람의 값이 되고, 부모의 경제력이 실력처럼 작동하며, 성적이 인격의 등급이 되는 현실 속에서 큽니다. 우리는 그것을 질서라고 부르지만, 아이들 눈에는 하나의 서열입니다.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집니다. 이쪽과 저쪽, 잘하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아이들은 그 선을 배우며 자랍니다.


복음서 시대에도 선은 있었습니다. 루카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고 전합니다(5,29-32 참조). 당시 유다 사회는 정결 규정으로 ‘깨끗한 자’와 ‘더러운 자’를 나누었습니다. 식탁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삶의 경계선이었습니다.


오늘 아이들이 성적과 아파트 평수로 친구를 나누는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정결 규정으로 사람을 나누던 모습과 닮았습니다. 선은 달라졌지만, 분류의 방식은 익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선을 해설하거나 공격하기보다, 그저 그 선 위에 함께 앉으셨습니다. 그 식탁은 경계를 몸으로 지운 자리였습니다. 들어올 사람을 가리는 자리가 아니라, 누구도 밀려나지 않는 자리였습니다. 복음의 급진성은 식탁에서 시작합니다.


루카복음 10장은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율법 교사가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예수님은 분류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질문을 바꾸십니다.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이웃을 가려내는 공부가 아니라, 이웃이 되어 주는 공부였습니다. 질문은 ‘선’ 대신 ‘자리’를 선택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비움’ 공부


서열과 경계를 결정하는 대신 서로의 곁에 서고 식별하는 일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를 미워하지 않으면…”(14,26 참조)이라는 말씀까지 남기십니다. 이 말씀은 가족을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혈연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초대에 가깝습니다. 가족마저 경계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직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공부는 누가 더 옳은지를 가르는 기술이 아니라, 누구 곁에 설 것인지를 배우는 연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비움’의 공부법은 여기에서 완성됩니다. 무엇을 더할지보다, 어떤 선을 지울지를 식별하는 일입니다.


이 공부는 가족 안에서 가장 먼저 시험 됩니다. 성적이 떨어진 날, 결과보다 먼저 아이의 마음을 묻는 일. 공부 잘하는 사람이 더 대접받는 분위기를 그대로 두지 않는 태도. 동네와 배경을 두고 오가는 차별의 농담을 웃으며 넘기지 않는 선택. 아이들은 부모의 반응을 통해 배웁니다. 어디에 선을 긋고, 어디에서 그 선을 지우는지를 식별합니다.


세상은 서열을 가르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아이를 키웁니다. 그러면서도 묻게 됩니다. 정말 이 길뿐일까. 복음은 선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쉽게 긋고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경계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누구를 밀어내기 위해 그은 선인지, 무엇을 지키겠다고 말하며 굳어진 선인지. 그리고 말없이 다른 자리를 보여 줍니다. 함께 앉는 자리입니다.


가족은 이미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라, 선을 조금씩 지워 가는 연습의 자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 식탁은 누군가를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삶과 식별을 듣는 자리일 수 있을지요. 그 질문이 조용히 남습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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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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