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은 창간 100주년 기획 ‘세계교회 지성에게 묻다’를 시작한다. 세계교회 안에서 신앙의 본질과 교회의 사명, 시대의 물음에 천착해 온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의 교회가 마주한 물음에 답을 구한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한국교회가 귀 기울여야 할 통찰의 언어를 세계교회 지성들과의 대화 속에서 찾아본다.
‘세계교회 지성에게 묻다’의 첫 순서로 안셀름 그륀(Anselm Gr?n) 신부를 초대했다. 그륀 신부의 책은 서점 종교 코너에서 늘 눈에 띈다. 전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된 수백 권의 저서, 수천만 독자. 독일 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살아온 이 수도자가 전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느님께 내맡기라는 것. 그는 자신의 저술과 영성 체험, 불안한 시대를 사는 이들을 향한 조언, 100주년을 앞둔 가톨릭신문에 전하는 당부,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준비하는 한국교회와 청년들에게 보내는 격려 등을 들려줬다.
여든에도 ‘현역’으로
그륀 신부는 2025년 1월 14일 여든 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러나 여전히 ‘현역’이다.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영성 강좌와 경영자를 위한 리더십 강좌를 진행하고, 베를린 노동부와 연방정보국 등 여러 기관의 요청으로 지도자 교육에도 나선다. 영적 위기를 겪는 사제·수도자·교회 직원을 위한 영성 치유 센터에서는 영적 지도자로 이들과 묵묵히 동반하고 있다.
왕성한 저술 활동의 비결을 묻자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영성을 살아가면서 자기 삶에 실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쉬운 언어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도덕적 훈계나 가르침을 앞세우기보다 “인간 영혼이 지닌 지혜에 말을 건네려 한다”며 “모든 사람 안에는 하느님과 영성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며 글을 쓴다”고 덧붙였다.
그의 저술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치유’다. 그륀 신부는 이 주제에 집중하게 된 계기를 4세기 초 사막 교부들에게서 찾는다. “사막 교부들의 영적 여정은 언제나 인간을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길이었다”고 말한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역시 본질적으로 치유와 회복을 향한 것이었음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치유와 내적 성장에 더욱 깊은 관심을 두게 됐다”고 설명했다.
변화가 아니라 ‘변모’
자신의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를 물었다. 그륀 신부는 “신앙은 끊임없이 나를 과시하고 정당화하며,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압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신앙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느님께 내드리라’는 초대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내 안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나를 변화시켜 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나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게 한다”고 설명한 그는 “내 안에 있는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느님께 내맡길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되며, 우리가 온전히 수용하고 하느님께 내드린 것만이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변화’를 넘어 ‘변모’될 수 있다”고 말했다.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그는 ‘정직함’을 꼽았다. 자신의 경우 “하느님 앞에서 고요히 머무르며 내면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그분께 내맡긴다”며 “이 고요한 만남 안에서, 평소 생활 속에서 억눌러 왔던 모든 어두운 면까지 마주하며 저 자신을 알아간다”고 들려줬다.
인공지능(AI) 시대, 위로는 화면이 아니라 만남에서
AI가 상담과 위로, 영적 조언의 영역까지 깊숙이 파고드는 현실이다. 그륀 신부는 이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었다. “현대 기술을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하지만, 거기에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특히 AI는 ‘위로’를 제공할 수 없고, 위로에는 컴퓨터 화면으로 읽는 글자가 아니라 사람과의 구체적인 만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시대에 영성을 지키기 위한 실천으로 그는 건강한 ‘절제(Askese)’를 제안했다. “끊임없이 정보로 나 자신을 가득 채워 넣지 않으려는 선한 절제가 필요하다”면서 “자신이 읽고 듣는 것을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내맡길 때, 세상 문제들만을 맴돌다가 그로 인해 무력해지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륀 신부는 오래전부터 일과 신앙, 영성과 일상의 균형을 강조해 왔다. 이 조화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매일의 개인 ‘예식’(Rituale)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오직 하느님과 나만의 영역인 ‘거룩한 시간’을 자신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내면의 태도입니다.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온전히 몰입해야 결코 소진되지 않습니다. 마르지 않는 성령의 샘에서 끊임없이 힘을 길어 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베네딕토 성인의 가르침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며 “남에게 과시하고 자신을 증명하려는 ‘자아(Ego)’가 아니라, 내면의 중심인 ‘참된 나 자신(Selbst)’에서 솟아 나오는 힘으로 일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오랜 세월 수도자로 살아오며 경험한 가장 깊은 영적 체험이 무엇인지 묻자, 그의 대답은 “내가 겪은 모든 일을 하느님께 가져가 그분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비로소 내면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중요한 점은 단순히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내드릴 때, 내 안의 모든 것은 비로소 변모될 수 있습니다.”
서울 WYD를 앞둔 한국 청년들에게
2027년 서울에서 세계청년대회(WYD)가 열리는 때를 바라보며, 그륀 신부는 한국 청년들을 떠올렸다. 그는 “많은 한국교회 젊은이가 교회 안에서 봉사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며 “세속화된 세상 속에서 신앙을 지켜 가야 하는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한국교회 청년들이 모범이 되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취업과 경쟁, 미래의 불안에 짓눌린 청년들에게 그는 “결코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희망은 기대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기대는 실망으로 끝날 수 있지만, 희망은 실망할 수 없습니다.” 그는 “희망은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삶이 어떤 모습이든 잘 되고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라고 얘기했다.
그륀 신부는 “이 불확실한 시대에 신앙이 우리에게 버팀목과 안정감을 선사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가 바로 희망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젊은이들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가톨릭신문에 바란다
창간 99주년을 맞은 「가톨릭신문」에 대해 그륀 신부는 “한편으로는 시대의 문제들에 당당히 맞서야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침묵으로 초대받을 수 있는 성찰의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어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신앙을 선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독자들에게는 먼저 신앙의 선인들에 대한 감사를 권했다.
“앞서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많은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내린 신앙의 뿌리 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분들이 가졌던 신앙의 힘을 함께 나누어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지금 이 시대에도 치유와 용기를 불어넣는 복음임을 신뢰해 달라는 부탁도 전했다.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이 복음은 희망을 선사한다”고 밝힌 그륀 신부. “한국교회 신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화해와 희망을 일구는 누룩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인터뷰를 맺었다.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가톨릭신문」이 창간 99주년을 맞이한 것을 축하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