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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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만난 복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요한 11,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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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친구 라자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고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 이 복음을 읽을 때 나는 다시 자유롭게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된 라자로의 심경을 상상해 본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과의 자유로운 만남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 숨 쉴 때마다 느껴지는 공기, 내 육체의 감각, 자연과 인간관계들, 귀를 통해 들려오는 온갖 소리와 코를 통해 느껴지는 다양한 내음 등….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자유롭다는 것을 만남을 통해 확인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반면 억압되어 있거나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들을 발견할 때는 두려움과 슬픔의 감정을 느끼고 죽음을 연상한다. 아무런 만남이 없거나 아무런 새로움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는 아마도 가장 큰 공포일 것이다.


이주 노동자들을 만나면 그들이 너무도 만남을 좋아하고 즐기는 모습에 놀라게 된다. 고된 작업과 노동으로 지친 와중에도 휴식의 시간을 갖게 되면, 그들은 항상 서로 모인다. 그들의 숙소나 편의점이 주된 만남의 장소이다. 공단 주변의 편의점에서는 밤늦게 소주를 쌓아놓고 마시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일에 이주민을 위한 미사가 끝난 후에도 그들은 성당을 바로 떠나지 않고 꼭 모여 음식을 나누며 시끌벅적한 만남의 시간을 즐긴다.


휴일이면 만남을 피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TV와 컴퓨터와 배달 음식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요즘 우리 사회의 풍조와는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나도 휴일에는 딱히 만남의 기회를 바라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습은 마치 돌무덤 속 라자로의 모습과도 같다.


어느 때부터인지 몰라도 우리는 스스로 몸을 감싸고 돌무덤 안에 들어가 죽음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만남과 친교가 더 이상 우리 삶에 기쁨과 활력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일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혼자 보내는 시간이 우리에게 점점 익숙해지는 삶의 방식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비록 그 삶의 방식이 아직은 그다지 쓸쓸하고 외롭지 않을지 몰라도, 이주민들의 친교와 만남의 모습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얼마 전 이주사목위원회를 방문한 경찰관 한 분이 이런 말씀하셨다. “저희 업무는 그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계도하고 도움을 주는 역할이지, 체류 비자와 관련하여 단속하는 업무가 주가 아닌데 이주노동자들은 서로 모여 대화하다가도 저희가 출동하는 모습만 보면 흩어져 달아나곤 합니다. 그들이 오해하지 않고 저희를 편안히 대할 수 있도록 신부님께서 이야기해 주세요.”


타국 땅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주민들의 삶은 때로는 불안에 의해 자유로움이 억압되기도 한다. 그런 이주민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그 불안과 걱정을 덜어주고 싶은 경찰관의 마음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부활을 맞이하면서, 이주민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떠한 속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함께 자유롭게 걸어가는 삶을 희망해본다.



글 _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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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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