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종교와 이단에 대한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들이 사람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 가운데 하나는 ‘죄의식’이다. “너는 죄인이다”, “지도자를 떠나면 멸망한다”는 메시지가 반복될 때, 추종자들은 자기 판단을 의심하고 결국 지도자의 말에 매달리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죄, 회개, 벌, 보속”이라는 전통적 종교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그 구조는 완전히 왜곡된 형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상세히 다루는 죄에 대한 성찰(I-II, qq.71?89)은 그들의 허구성을 명확하게 드러내 준다.
자유로운 인격에서 조종당하는 객체로 전락한 피해자
토마스에게서 죄는 단순히 사회적 규범의 위반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해야 할 최고 규칙인 이성과 영원법(lex aeterna)에 대한 거부이자 ‘이성의 질서’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I-II,71,6).
그런데 사이비 종교집단에서는 죄의 기준이 음험하게 바뀐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뜻, 성모님의 뜻, 성령의 인도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지도자의 명령과 집단의 규칙이 절대 기준이 된다. 사이비 종교집단은 이를 어긴 모든 것을 불순종, 배교, 불신앙으로 낙인찍어 죄로 규정한다. 피해자는 조종자가 설정한 자의적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이성적 판단보다 조종자의 목소리를 더 신뢰하게 된다.
토마스는 죄가 ‘무질서한 자기 사랑’(I-II,77,4)에서 생긴다고 보면서, 그 뿌리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둔다.(I-II,75,1) 죄는 강요된 행동이 아니라, 자유의지가 잘못 사용된 결과이며, 따라서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도 가능하다. 자유로운 인격이 이성의 질서를 일부러 거슬렀을 때, 비로소 죄가 성립한다.
그러나 사이비 집단은 신자가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적 공포나 본능적 감정의 흔들림까지 죽을 죄, 즉 ‘사죄(死罪)’로 몰아세운다. 지도자는 “너는 본질적으로 형편없다”며 지속적으로 비난하여 수치심을 주입하고, 피해자의 ‘상상력(imaginatio)’에 지옥과 파멸의 이미지를 투사함으로써 피해자의 이성을 어둡게 만든다.(I-II,80,2)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나는 이렇게 선택한다’가 아니라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심리 상태로 밀려난다.
그런데 추종자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적 동요를 사죄로 규정하여 ‘정서적 노예’로 만드는 행위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의지가 이성에 의해 도출된 ‘선택된 행위’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죄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타인의 자유를 체계적으로 파괴해 자기 권력 아래 묶어 두려는 지도자의 행위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질서(영원법)에 대한 반역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중대한 죄이다.
왜곡된 죄의식 강요하는 사이비 집단…‘정서적 노예’ 만들며 인간 이성 파괴
분별력 있는 신앙만이 참된 행복의 길…성찰과 회개로 은총과 자유 되찾아야
죄의 이중 구조: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과 피조물로의 전향
토마스는 죄를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aversio a Deo)”과 “피조물로의 무질서한 전향(conversio ad creaturam)”의 긴장 속에서 이해한다.(I-II,72,2) 죄는 단순히 어떤 나쁜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궁극목표이신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 자리를 한정된 선(쾌락, 부, 명예, 권력 등)으로 대체하는 내적 방향 전환이다.
사이비 종교의 구조를 이 틀로 읽어 보면, 한 가지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겉으로는 “하느님, 성모님”을 연호하지만, 실제로는 신자들의 시선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내 지도자와 공동체에 고정시키는 구조가 형성된다. 사이비 지도자는 이성을 거스르는 자신의 명령을 ‘정의’로 둔갑시켜 피해자의 의지를 굴복시킨다. 이로써 피해자의 영혼은 하느님과 이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태에 빠지며, 오직 가해자라는 피조물에 집착하는 전도된 지향성을 갖게 된다.
이렇게 만든 지도자는, 토마스가 “모든 죄의 시작”(罪宗)이라고 부르는 교만(superbia)의 죄를 범하고 있다. 스스로를 다른 이의 최종 목적처럼 대하며, 하느님의 자리를 찬탈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실수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상습적인 형태의 죄 속에 있는 존재다. 더 나아가 사이비 종교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가혹한 ‘영적 벌’과 ‘체벌’은 하느님의 정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I-II,q.87) 그것은 하느님 이름을 앞세운 사적 폭력이며, 오히려 그 폭력을 행사하는 측의 죄를 늘려 갈 뿐이다.
영구적인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은총
토마스에게서 중요한 결론은, 현세에서의 죄는 언제나 용서와 치유의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그는 “죄는 용서될 수 있다”(I-II,88,1)고 분명히 말하며, 하느님은 그분의 은총으로 죄를 씻어 주신다고 가르친다.(「신학요강」146) 죄의식은 회개와 고해, 은총의 수용을 통해 평화와 자유로 나아가는 길의 일부이지, 영원히 붙들려 있어야 할 쇠사슬이 아니다.
반대로 사이비 집단에서 죄의식은 의도적으로 끝없이 연장된다. “아직도 네 죄가 충분히 씻기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반복된다. 죄책감은 은총과 자유로 향하는 출구로 안내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의존과 공포로 몰아넣는 회로 속에 갇힌다. 이것은 토마스가 말하는 죄?형벌?은총의 구조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죄는 심각한 악이지만, 그 목적론적 지평에는 어디까지나 은총과 회복, 최종 행복이 놓여 있다. 죄의식은 자신을 정죄하고 타인에게 예속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더 높은 선을 향해 나아가는 성찰의 기회여야 한다. 죄의식이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아니라, 영구적인 노예 상태를 유지하는 수단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죄의식이 아니다. 사이비 집단의 피해자는 가해자가 주입한 거짓 죄의식을 걷어내고, 자신의 본성적 선인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을 복원해야 한다.
토마스가 통찰했듯,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우리를 억압하는 사슬이 아니라, 오히려 결여된 선을 회복하고 이성적 자유와 하느님 안에서의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분명하다. “죄, 회개, 벌, 보속”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이 나를 더 자유롭게 하느님께 향하게 하는지, 아니면 더 깊이 어떤 한 인간이나 폐쇄적인 집단에게 예속시키는지를 분별하는 일이다. “은총은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성적 분별력을 갖춘 건강한 신앙만이 인간을 정서적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참된 행복의 길로 복귀시킬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