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관계의 존재이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이 “인간은 홀로 된 섬이 아니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근본적 경험인 사랑은 오로지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 관계 안에서 상처받고, 관계를 통해서 용서와 치유의 길로 나아간다. 신처럼 흠 없는 인간은 없기에, 완벽한 관계의 대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계를 맺는 대상이 완벽하진 않지만, 우리는 그 대상을 온전히 품을 수는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방황과 회귀의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작은 행성인 B612를 떠나 여러 행성을 여행하며 마침내 지구에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떠남, 여행, 귀향에 대한 여정은 모두 관계에 대한 선택의 문제와 연결된다.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다양한 관계들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전파도 여행과 귀환의 서사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 여정을 시작한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지만, 예수님은 소외당한 죄인들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에 복음의 참 의미를 깨닫는다. 다시 갈릴래아에서 부활한 스승을 만나고 복음 전파를 시작한다.
어느 날 어디에선가 날아 온 씨앗은 아름다운 장미꽃이 되었다. 어린 왕자는 꽃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았지만, 동시에 장미의 여러 가지 요구들과 태도에 묻어나는 ‘교만함‘과 ‘허영심‘에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더 이상 장미를 돌볼 수 없다고 판단한 주인공은 자신의 행성에서 ‘도망‘치기로 결정한다. 비록 그 꽃이 ‘자신을 향기롭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지만, 주인공은 꽃의 완벽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여섯 개의 행성을 돌아다니면서 여섯 명의 어른을 만난다. 모든 것을 통제하며 권력에 집착하는 왕, 남들의 칭찬만을 갈망하는 허영쟁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술에 중독된 술꾼, 자신이 소유한 별들의 숫자만을 세고 있는 탐욕스러운 사업가, 기계처럼 성실하고 열심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만,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가로등 켜는 사람, 실제 경험을 무시하고, 책으로만 탐구하는 지리학자.
이들은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갇혀 있다.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에 몰두한 나머지, 삶의 더욱더 큰 의미를 보지 못한다. 겉으로는 열심히 노력하고 뭔가를 이루어 가며 스스로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지만, 내면은 공허할 뿐이다. 삶의 참된 충만함을 채울 수 있는 관계의 역동성을 놓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숫자와 껍데기만을 추구하는 어른들과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어린 왕자는 매번 “어른들은 정말 아주, 아주 이상해”라며 다른 행성으로 발길을 옮긴다.
방황하던 어린 왕자 ‘길들임’으로 소중한
존재 만들며 관계 속 ‘선택’ 의미 깨달아
예수님이 죄인들 회심 시키셨듯 윤리적
책임감 갖고 관계에 끝가지 충실해야
마침내 일곱 번째 행성인 지구에 도착하여 여우를 만난다. 주인공이 여우와 관계를 형성해 가는 과정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슬픈‘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놀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여우는 ‘길들여지지 않아서‘ 놀 수 없다고 대답한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길들이기는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통하여 두 존재가 서로에 대한 의미를 천천히 가꾸어 가는 과정이다. 갑작스럽게 처음부터 뜨거운 열정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좀 떨어져서‘ 앉고, ‘언제나 같은 시각에 와서‘, ‘조금씩 더 가까이 앉으라‘고 요청한다. 매일 규칙적으로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어느 순간 서로 길들여지게 된다.
여우의 길들이기는 관계를 맺는 상대방에게 물리적 시간을 충분히 허락하는 것이다. 한 존재에 대한 지식을 밤새워 달달 외워서, 그 존재를 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함께 보낸 평범한 일상 시간의 양만큼 관계의 깊이가 형성된다. “사람들은 이제 뭘 알려고 시간을 들이지 않아. 가게에서 완제품을 사거든. 그런데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으니 이제 친구도 없는 거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
길들임의 관계를 통해 평범한 것은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가 된다. 길들이기 전에는 각 존재가 다른 존재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주인공이 길들이기 전 여우는 다른 여우로 대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다. 이 여우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내재적으로 타고난 속성이 아니라, 주인공이 들인 시간과 정성이다.
예수님이 공생활 중에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방법은 바로 함께 물리적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양한 기적들과 죄인들의 용서를 말씀으로 행하신다. 세관장인 자캐오에게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라고 말씀으로 죄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다. 즉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같은 공간에서 잠을 청한다. 사실 자캐오는 자기 집에 들어와서 함께 음식을 나누는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서 회심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캐오는 죄인들 중의 한 명이 아니라,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한 존재가 된다.
어린 왕자는 깨닫는다. 자신의 행성에서 돌보던 장미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해 도망쳐 나온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비록 장미를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이 장미를 돌보며 보낸 시간이 이미 장미를 소중하게 했다는 것. 그래서 그 장미는 다른 꽃들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매우 고유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길들임은 인식의 변화를 불러온다. 마지막에 여우는 주인공에게 “본질적인 건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고 일깨워준다. 어린 왕자의 눈에 비친 장미는 교만하고 허영심으로 가득했지만, 비로소 마음으로 바라본 장미는 모든 장미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유한 존재가 된다. 시간을 통한 길들임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은 장미는 어린 왕자의 마음에 온전히 들어올 수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목사인 아버지는 노름판에서 싸우다 죽은 작은아들의 장례식에서, “이 아들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루카복음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변명과는 상관없이, 그저 아들로서 안아주고 잔치를 베푼다.
또한, 이 관계는 단순한 정서적 친밀감을 넘어서, 윤리적 책임감을 수반한다. 여우는 주인공에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넌 언제나 책임이 있어”라고 알려준다. 누군가를 길들였다면, 그 관계에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연과 동물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도 있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