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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이 순간을 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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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좋아해요. 맑은 햇살도 좋아하지만, 비가 내리면, 특히 늦은 밤에 빗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콩콩 뛰어 잠이 들지 못한답니다. 오늘, 봄비가 촉촉이 내린 한낮, 일을 마치고 기분 좋게 걷고 있었어요. 이 비 그치면 세상이 얼마나 더 파릇파릇해질지 생각하면서요. 사람들이 광장에서, 꽃나무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네요. 지금 이 순간은 전쟁 걱정도, 취업 걱정도, 사무실에 들어가 처리해야 할 서류 걱정도, 아픈 가족 걱정도 다 잊은 표정이에요.


친구와 차를 마시고 나오니 바람결이 좀 거칠어지네요. 빗방울도 굵어지고 순한 봄비가 여름 폭풍처럼 사나워지네요. 느긋하게 걷던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빨리하네요. ‘이러다 저 꽃들 다 지겠다’ 싶어서 그만 마음이 아슬해졌어요. 젖은 보도 위로 꽃잎들이 이미 점점이 떨어지고요. 아깝다, 안타깝다, 어쩌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 꽃들은 이미 제 몫을 충분히 했구나. 온전히 이 순간에 존재한 것으로, 이 세상을 환하게 밝힌 이 며칠의 빛으로 충분했구나. 벚꽃은 벚꽃대로, 목련은 목련대로, 피어나 지는 생명의 순리를 이리도 아름답게 보여주었으니.


온전히 이 순간을 사는 일. 상실을 미리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첫 마음을 다 보여주고 떠나는 꽃무덤을 보며, 더 이상 슬프지 않았던 오후. 지난 일을 놓지 못하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없이 그저 지금 여기 이 순간 피어 있음의 의미를 알게 한 꽃나무.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고, 쌓아두고 쟁여두는 걱정도 말라고, 마음이 바빠 마주하는 사람과의 대화에도 집중하지 못했던 어제를 반성하며 돌아오는데, 멀리서 친구가 사진을 보내줍니다. “이 비에도 꽃나무에 꽃잎이 그대로야. 의연하지? 연약한 꽃잎이 강한 비바람을 이기는 것 같아. 기운 내.”


마음이 괜히 서성이고 불안한 날에는 작고 연약한 것들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이 세계가 너무 위태롭게 느껴질 때는 부드러운 것들에 마음을 내어줍니다. 아이의 웃음, 투명한 햇살 한 자락, 고요한 순간에 들리는 가느다란 새소리, 보드라운 연둣빛, 빗방울 소리, 어느 날 받은 카드 한 장.


온전히 이 순간을 사는 일은 떠들썩한 소란 대신 고요에 기대는 일. 복잡한 계산 대신 단순함을 믿는 일. 고단한 하루를 화로 풀지 말고 감사로 여미는 일. 이 순간의 충일함에 기대어 한 걸음 걷다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어느새 가까워집니다. 희망이 곧 믿음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믿어요. 힘을 좋아하고 협박과 억압을 즐겨 하는 이들이 일으킨 전쟁은 작고 연약한 것들을 보듬는 생명과 평화의 기도에 곧 지게 될 것이라고요. 늘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이 오늘 봄비 속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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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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