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일은 성소(聖召)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Vocatio Dei)이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결심이나 선택이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겠다고 부르시는, 당신 사랑에로의 초대입니다.
이 초대는 부르심을 받은 이의 구체적 상황 안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는 개별적이지만, 언제나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불러주시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 교회 전체로 이끄신다는 것이지요.
요한복음이 전하는 목자의 비유는 개별성과 보편성이라는, 부르심이 갖는 두 가지 측면을 잘 드러내 줍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목자는 먼저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만, 그런 다음에는 양들이 한 무리를 이뤄 자기를 따르도록 하지요.(요한 10,3-4 참조) 이때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아는 것”(요한 10,4)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의 원형은 ‘에이도(ε?δω)’입니다. 그런데 이는 본래 ‘보다’라는 뜻에서 출발하는 말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사용되지요. 이를테면,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갔을 때 “그분의 별을 보고”(마태 2,2) 따라갔는데, 이때 ‘보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 에이도입니다. 그들은 또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자’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는데(마태 2,11 참조), 이때도 에이도가 반복되고요. 그 후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고, 그분은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는데(마태 3,16 참조), 이때도 역시 에이도를 씁니다.
그렇다면, 원래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왜 목자의 비유에서는 ‘안다’라고 번역할까요?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 걸까요? 내 눈으로 직접 ‘본다’라는 것은 곧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보통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앎’을 형성하지요.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소리를 들어‘보는’ 것, 냄새를 맡아‘보는’ 것, 음식을 먹어‘보는’ 것, 감각을 만져‘보는’ 것을 통찰함으로써, 인간은 보는 것을 통해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고백록」, 10권 35장 참조) 인간 정신의 인식 능력은 보는 행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는 것은 양들이 이미 목자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또 양들이 목자를 ‘보았다’는 건, 양들이 목자와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체험적으로 목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안다는 건, 알게 된 대상과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전제합니다.
따라서 복음에서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요한 10,4)라고 한 건, 그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양들이 목자를 온전히 따르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매우 친밀한 관계 속에서 상호신뢰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목자가 양들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양들이 한 무리를 지어 목자를 따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믿음의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은 결국 관계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아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 내가 그분을 어떻게 ‘만났고’, 얼마나 ‘보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알기 위해서는 오래 보아야 하고 자주 만나야 하며 깊은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그분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의 깊이가 곧 부르심의 척도입니다.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에 있는지 살펴볼 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깊이 바라보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고 있나요?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