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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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카르체리 성지, 하느님이 계신 곳에 평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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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800m에 있는 ‘에레모 델레 카르체리(Eremo delle Carceri)’는 포르치운콜라 경당에서 약 6km 떨어진 수바시오산의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고요한 성지입니다. 이곳은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이 은둔하며 묵상에 잠기고, 더욱 간절한 기도 생활을 하며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곳입니다.


‘카르체리(Carceri)’는 라틴어 카르세르(carcer)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 ‘울타리’를 뜻합니다. 종교적으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과 떨어져 머무는 외딴 장소, 곧 은둔소를 의미합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카르체리는 하느님께 온전히 마음을 두는 안식처이자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이는 프란치스코의 제자이자 작가인 첼라노의 토마스가 그의 책에서 기록한 다음의 글에서도 드러납니다. “프란치스코는 영혼만이 아니라 몸까지도 주님과 하나 되려고 늘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녔고, 장소가 없으면 망토로 방을 만들었으며, 망토가 없으면 옷소매로 얼굴을 덮었고, 옷소매마저 없으면 가슴에 성전을 만들었다.”


또한 그가 머물렀던 여러 은둔소에는 공통적으로 바위와 물이라는 상징이 나타납니다. 바위는 든든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고, 물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성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카르체리 역시 이러한 영성을 공유하는 장소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페루지아 전쟁(1202년) 패배와 1년간의 감옥 생활 이후 아시시로 돌아와 이곳에서 은둔하며 침묵 속에서 묵상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했을 것입니다.


홀로 잠자고 기도하던 프란치스코의 바위 동굴 은둔소에는 웅크려 누울 정도의 공간만 남아 있지만, 진정한 자유는 귀족으로의 신분 상승이 아니라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주인이신 예수님과 하나 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가난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형제들과 자신의 것을 나누는, 그리고 모든 이와 자신의 것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나눔은, 줄어듦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성해지는 주님의 현존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머무르며 기도했던 이 장소를 중심으로 15세기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설교자인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 성인에 의해 여러 수도자가 머물 수 있는 수도원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계신 곳에 평화 있다(Ubi Deus, ibi pax)’라고 적힌 문을 지나면 두 개의 우물이 있는 회랑, 사방이 막힌 사각형 구조의 정원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외형적으로는 삼각 정원처럼 보이지만,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수도원 구조와 공간적 의미를 고려하면 ‘무형의 사각의 정원’이라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수도원의 우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의 물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공동체 생활의 가장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베르나르디노 성인의 설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예수는 세상의 빛, 태양 같은 존재’라는 표현을 상징하는 ‘IHS’ 문양이 새겨진 문을 지나면, 바위 절벽을 깎아 만든 공동 식당이 있습니다.


성당이 기도를 하는 영적 양식을 위한 공간이라면, 식당은 육체적 양식을 위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모든 식사를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여겼기 때문에, 수도자의 앞자리는 항상 비워 두었습니다.


식당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15세기에 조성된 수도자들의 독방으로 이어집니다. 바위 절벽과 맞닿은 복도 사이에 자리한 이 독방들은 침묵과 인내, 기도와 찬미의 삶을 상징합니다.



프란치스코가 머물렀던 동굴 옆에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기도소인 ‘성모 마리아 경당’이 있습니다. 초기 형제들이 함께 기도하던 이곳에는 아기 예수님을 안은 채 옥좌에 앉아 있는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제단화가 있는데, 이는 1506년 아시시의 티베리오가 그린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제단화 안에는 13세기에 그려진 십자가상 제단화가 겹쳐 있습니다. 아기 예수와 십자가의 예수를 겹쳐 표현함으로써, 육화하신 아기 예수님이 운명처럼 다가오는 자신의 희생을 아는 듯하여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 사이에 앉아 계신 성모님은 더욱 깊은 위로로 다가옵니다.


프란치스코의 동굴 밖으로 나오면 절벽 아래 구멍이 뚫린 붉은 돌바닥이 보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들」 29장에는 이곳에서 루피노 수사가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프란치스코는 루피노에게 재치 있게 대응하도록 권했고, 그 말에 격분한 악마가 절벽에서 떨어지며 돌에 구멍을 냈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유혹에 흔들릴 수 있지만, 인내와 믿음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지금은 물이 마른 계곡의 다리를 건너면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보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설교할 때 새들이 머물렀던 나무라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 시대부터 존재해 온 나무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이곳부터 오래된 참나무 숲길을 따라 산책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 10항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그는 신비주의자이자 순례자였으며, 하느님과 타인, 자연 그리고 자기 자신과 놀라운 조화를 이루며 소박하게 살았습니다.”


‘모든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말보다 ‘하느님 계신 곳에 평화 있다’는 말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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