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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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죄와 벌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데 장애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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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종교 집단이 과도하게 ‘죄의식’을 이용해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면, 이와는 정반대로 현대 사회에서는 죄 자체나 죄의식을 경감하려는 경향도 널리 퍼져 있다. 현대의 지나친 낙관주의는 죄를 실재하지 않는 심리적 위축으로 치부하거나, 오히려 죄를 ‘매력적인 벗’으로 여기며 그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현대인들은 대개 ‘안락’과 즉각적인 ‘욕구 충족’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에서 행복을 찾으며 고통과 불편을 악(惡)으로 간주하여 회피한다. 이런 경향에 따라 많은 이가 죄란 실재하지 않거나, 설령 실재하더라도 그 결과가 별것 아니라고 안이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에서 강조하는 ‘죄(Peccatum)’와 ‘벌(Poena)’이라는 개념은 현대인에게 자율성을 침해하는 비이성적 권위의 압제로 비춰지곤 한다. 그렇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죄와 벌에 대한 이론을 상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판단과 이에 따른 거부감이 상당 부분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심리적 욕구 충족에 따른 자아 긍정과 ‘무질서한 자기 사랑’의 대비


내면의 평안과 욕구의 충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현대 심리학과는 대조적으로, 토마스는 ‘무질서한 자기 사랑(inordinatus amor sui)’을 모든 죄의 뿌리로 규정한다.(I-II,77,4) 이는 자아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사랑의 서열이 뒤바뀐 상태에 대한 지적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올바른 자기 사랑’이란 자신의 이성적 본성을 보존하고 최고선인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지만, ‘무질서한 자기 사랑’은 세상의 선에 집착함으로써 불변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어리석음(愚)에 빠지고 만다.


현대인은 죄를 개인적 실수나 트라우마의 산물로 보며 자기 용서에 집중하는 반면, 토마스는 이를 이성의 규칙과 영원법에 대한 무질서로 규정한다. 무질서한 자기 사랑이 결국 본래적 자아를 포기하고 가변적 욕망의 노예가 되는 과정임을 깨달을 때, 토마스의 엄격함은 인간 본성을 지키기 위한 경고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성적 본성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된 죄


토마스에게 죄는 외부 권력의 명령을 어긴 행위이기 이전에, 인간의 행복을 스스로 침해하는 ‘자신의 본성에 대한 배신’이다. 그는 죄를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인 동시에 ‘가변적인 선으로의 무질서한 전향’으로 정의한 바 있다.(I-II,84,1) 죄를 짓는 자는 이성이 사려 깊게 정한 목표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파괴하고 내면의 무질서(chaos)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분석은 죄가 인간다움의 실현을 방해하는 비본성적 행위임을 입증한다. 죄를 경계하는 이유는 외부의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인간다움을 가장 완전하게 실현하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현대의 상대주의 윤리는 “실수하는 것이 인간”이라며 책임을 외부 환경이나 운명으로 전가하지만, 토마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죄의 원인을 무지, 정념, 혹은 악의(malitia)라는 내적 요인으로 세밀히 분석함으로써(I-II, qq.76-78), 인간이 자기 행위의 주인이라는 ‘주체성’을 역설한다.


즉, 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외부의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함이다. 죄가 본성의 왜곡임을 이해할 때, 그에 따른 ‘벌’의 의미 또한 단순한 보복에서 질서의 회복으로 전환된다.


죄는 인간 자신의 본성에 대한 ‘배신’…스스로의 존엄 지키기 위해 경계해야


벌은 파괴된 질서 다시 세우는 ‘환원’…하느님 은총으로 인간 본성 회복해야


이성적 성찰로 자신의 결여 직시할 때 진정한 행복과 평온함 되찾을 수 있어


응보를 넘어선 죄악의 치료와 질서 회복을 위한 벌


토마스에 따르면, 벌은 일차적으로 권력자의 복수가 아니라, 파괴된 질서를 다시 세우는 ‘정의의 환원’이자 ‘죄악의 치료제(medicina culpae)’이다. 죄는 세 가지 질서 즉 개인의 이성, 사회적 관계 그리고 하느님의 통치 질서를 동시에 파괴한다. 죄의 결과로 수반되는 양심의 가책, 사회적 불명예, 신적 진노는 현대인에게 심리적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지만, 이는 사실 파괴된 질서에 대한 본성적 경고이다.(I-II,87,1) 따라서 벌은 이 세 영역에서 정의를 재정립하는 필수적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보다는 엄격한 응보와 처벌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자유와 욕망을 존중하는 인간들을 죄책감의 노예로 만드는 체계처럼 느껴진다. 특히 정의를 일종의 공평함이나 비례로 보는 현대인들은 시간 안에서 저질러진 일시적인 죄에 대해 영원한 벌(poena aeterna, 영벌)이 부과된다는 점에 대해 심한 저항감을 느낀다.


토마스는, 하느님이 그런 벌을 내리시는 것은 멸망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 정의의 질서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영벌이 하느님의 강요가 아니라 인간 의지의 ‘완고함’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I-II,87,3) 인간이 궁극 목적인 하느님으로부터 영구히 돌아서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머물기를 고집했기에 영원한 벌이 성립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벌을 ‘영원한 처벌의 벌(poena damni)’과 ‘유한한 감각의 벌(poena sensus)’로 정교하게 구분한다.(I-II,87,4) 또한 그는 죄의 경중을 생명 현상에 비유한다. 사죄(死罪, peccatum mortale)는 최종 목적으로부터의 회복 불가능한 전복(顚覆)으로서 ‘죽음’과 같으며, 경죄(輕罪, peccatum veniale)는 질서의 방향은 유지하되 수단에 혼란이 생긴 ‘질병’과 같다. 벌은 이 질병을 치유하고 죽음의 질서를 정의로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I-II,89,2) 이렇게 벌의 치유적 성격을 이해하면, 인간은 은총을 통한 본성의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죄와 벌 담론은 현대인의 행복을 억압하는 굴레가 아니라, 왜곡된 본성을 진단하고 치유하는 ‘심리적 해부도’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본성의 손상’을 온전히 치유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치유된 본성의 상태’로 나아가는 관계적 회복이 필수적이다.(I-II,87,7) 이는 자기만의 힘으로 자아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현대적 환상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타인 그리고 자신과의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참된 행복은 죄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메커니즘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있으며, 벌을 회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의 과정으로 수용함으로써 완성된다. 이성적 성찰을 통해 자신의 결여를 직시하고 책임질 때, 비로소 인간은 주관적 만족을 넘어선 진정한 평온함에 도달하게 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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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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