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도덕적 건강함의 척도는 구성원들이 부끄러움에 대한 가치를 얼마나 진지하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어느 공동체나 죄스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죄스러움에 대한 태도가 그 공동체의 의식 수준을 결정한다. 법적인 판단과 처벌에 따른 처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적 양심에 기초한 부끄러움의 감정이다.
1899년 71세의 나이에 톨스토이는 10년의 작업을 거쳐 「부활」을 출판한다. 로맹 롤랑이 ‘예술적 성서’라고 극찬한 작가의 마지막 장편 소설은 주인공인 네흘류도프 공작이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내적으로 부활하는 이야기이다. 톨스토이는 출간 2년 후인 1901년 러시아정교회로부터 파문당했을 정도로, 교회와 사회의 무디어진 양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동시에 대조적으로 주인공의 다시 깨어나는 양심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바오로 사도는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 주된 이유에 대해, 법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 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없는 양심‘을 지녀야 한다고 권고한다.(사도 24,16 참조) 아우구스티누스도 도덕적 감각과 관련하여 외적인 법정보다는, 내적인 법정을 강조한다. 「고백록」에서 “하느님은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다”고 표현한 것처럼, 내적 양심은 단지 고귀한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 진리를 만나는 성스러운 곳이다.
네흘류도프는 살인 사건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는데, 절도와 살인 혐의로 피고석에 앉아 있는 매춘부가 과거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채 쫓겨난 카츄샤임을 알아본다. ‘그 같은 죄를 양심에 파묻은 채 편히 살았던’ 그는 자신의 ‘냉혹함과 잔인함, 비열함을 인정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만, 혹시라도 그녀와 변호사에 의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창피당할까 두려워한다.
또한 주인공은 과거의 죄스러운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특히 동물적 욕망을 채우고 그녀에게 ‘억지로 돈을 쥐여주고 달아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혐오와 공포‘를 느끼며 자신이 얼마나 ‘비열했는지‘ 자책한다. 소리 내어 자신을 ‘그런 무뢰배, 그런 악한‘이라고 말한다. 결국 자신의 악행으로 한 여자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
자기 잘못에 대한 진실한 성찰엔 부끄러움이 따른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깊어지면서, 주인공은 계속해서 ‘부끄럽고 역겹다. 역겹고 부끄럽다’라는 감정을 경험한다. 남들 앞에서 겪게 될지도 모르는 외적 창피함과,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부끄러움 사이에서 갈등한다. 외적 창피함을 피하기 위해선 내적 부끄러움을 견뎌야 하고, 내면의 자유를 얻기 위해선, 세상의 심판을 대면해야 하는 진퇴양난이다.
이러한 갈등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가치관의 대립이다. 외적 창피함은 남의 평가나 시선을 중요시한다. 의도적으로 내면의 상태를 감추는 외적 이미지를 꾸며낼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위선과 자기기만을 초래한다. 그러나 내적 부끄러움은 엄숙하고 신성한 진실 혹은 진리에 기초한다. 두 개의 가치관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어서,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 개의 가치관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활」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여성의 삶 파괴했던 과거 악행에
부끄러움 느끼며 진실하게 반성…이타적인 삶 결심하고 사랑 실천
부활은 한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하느님의 가치관 지켜내는 여정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하느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대립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지상의 도성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가치관을 따르지만, 하느님의 도성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가치관이 우선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지상의 도성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 지상의 가치관을 경계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가도록 초대받는다.
결국 이러한 대립 사이에서, 네흘류도프는 진리의 목소리를 선택한다. “세상 사람들이야 마음대로 판단하라지. 그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어”라고 깨닫는다. 지상의 도성에서 창피함보다, 하느님의 도성에서 부끄러움을 더 두려워하게 된 결정적 순간이다. 남의 시선과 평가를 초월하여 내면의 엄숙하고 신성한 진실을 선택함으로써 자기 책임을 삶의 중심에 두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가슴속에는 고통스럽기는 하나 평안을 주는 뭔가가 있었다.” “정말 좋다! 정말 좋다. 아, 정말 좋다!”라고 표현하며 눈물을 흘린다. 카츄샤를 버린 이후 ‘그의 내면에서 잠자던 정신적 존재가 깨어난 것을 기뻐하는 눈물‘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죄에 대한 부끄러움의 중요성을 여러 강론에서 언급한다.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 반드시 ‘양심 성찰‘을 한다. 고해소에서의 진정한 고백은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단순히 ‘죄의 목록‘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죄를 저지른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람은, 바로 도덕적 판단력과 타인에 대한 존중감을 잃어버린 것이다.”(2020년 9월 3일 강론)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은총이다”(2025년 10월 13일 강론)라고도 한 바 있다. 왜냐하면 죄스러움에 대한 부끄러움은 나약한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부정적인 절망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치유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 악행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카츄샤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적으로 참회하고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대로 편안하고 부유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양심의 숭고함과 성스러움은 더 이상 내면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나를 얽매고 있는 이 허위를 부숴버리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모두에게 진실을 말하며 진실만을 행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카츄샤와 세상을 향해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간다. 감옥에 있는 그녀를 방문해 용서를 구하고, 자기 영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준다. 그녀의 유배지인 시베리아까지 따라간다. 그러면서 사회의 다양한 모순과 불의를 목격한 후에, 카츄샤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위해 온전히 이타적 삶을 결심한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은 그에게 구원의 문을 새롭게 열어 주었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물리적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던 양심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양심을 흔들어 깨울 때, 발생하는 부끄러움의 감정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이 감정을 통해서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다시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게 되기 때문이다. 이 순간 하느님은 우리 삶 안에서 구원의 활동을 시작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한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며 부끄러워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신다.(루카 5,8 참조)
그래서 부활한 양심은 내면에 머물지 않고,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간다. 부활은 한 순간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불의한 사회 안에서, 계속해서 하느님 도성의 가치관인 이타적 사랑을 살아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