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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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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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한다, 밥상을 차린다, 식사한다, 식탁을 정리한다, 설거지한다, 밀가루 반죽을 한다, 빵을 굽는다, 함께 먹는다, 설거지한다, 국을 끓인다, 김장김치를 썬다, 밥상을 차린다, 밥을 먹는다, 설거지한다, 라면을 끓인다, 설거지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기. 하지 않으면 단박에 표나지만, 열심히 해도 표가 안 나는 일들이다. 생색을 낼 만한 일도 아니다. 식구 외에는 잘한다는 칭찬도 별로 하지 않는다. 가족조차 무관심하면 기운이 빠지는 일이다.


매일 쌓이는 설거지가 특히 그렇다. 청소는 하루이틀 건너뛸 수 있지만, 설거지는 하루를 넘길 수 없다. 요리는 “잘 먹었다” 인사도 받고 누군가를 살게 하는 유의미한 일이기도 하지만, 설거지는 주변의 반응도 별로 없고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단순노동이다.


그런데 하지 않으면 음식을 만들 수도, 먹을 수도 없고 생활도 안 된다. 하기 싫어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집안에서든 성당에서든 청와대에서든 교황청에서든,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해야 하지만 의미는 가려져 있는, 거의 허드렛일 취급을 받는다. 설거지도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일까.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이 ‘객체-지향적 존재론’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쉽게 정리하면 이런 뜻이다. 인간만이 주체가 아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객체다, 인간은 객체를 다 파악할 수 없고, 모든 객체는 경계를 지을 수 없는 고유의 깊이가 있으며, 인식할수록 경계를 무한히 확장하는 우주적 차원을 지닌다, 인간이 인식하는 모든 대상은 그 인식에서 벗어나 깊은 심연으로 끝없이 멀어진다는 것이다.


설거지. 그 대상인 밥그릇 모두 이 이론의 사례로 삼을 수 있다. 설거지는 주방의 일인가 싶으면 주방 밖으로 멀어지고, 건너편 집 부엌에서 벌어지는 일인가 싶으면 누군가의 직장 생활과 연결되고, 사실상 인간 생존의 세계가 된다.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는 일인가 싶으면 식탁에서의 대화로 이어지고 가족 관계, 더 큰 인간관계와 연결된다. 이렇게 설거지는 주방 밖으로 물러나고, 확장되고, 끝없는 심연으로, 전 우주로 이어진다. 설거지가 우주적 행위이자 사건이 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주방 세제, 계면활성제, pH 조절제, 향료, 보습제, 방부제의 세계로 끝도 없이 나아간다. 식후에 마셨던 커피, 잔에 남은 얼룩, 아프리카의 태양과 토양, 커피 볶는 이의 땀, 원두 운송선의 화석 연료. 


남은 김칫국물, 강원도 고랭지, 대형트럭과 한겨울 아스팔트, 배달업자의 방한복, 누군가의 생존과 생활. 커피 한 잔은 아프리카까지 멀어지고, 밥상에 흘린 김칫국물은 강원도 배추밭과 농부의 손으로 연결되며, 태양까지 나아간다. 경계가 끝도 없이 확장된다.


설거지는 커피 한 잔에 얽힌 우주적 인연의 고리(多)를 지금 여기서 수세미와 그릇을 씻는 손과 시원한 물줄기 안에 수렴시키는(一) 과정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나 속의 여럿(一中多)’의 사건이다. 주방에서 벌어지는 작은 행위면서 우주로 이어지며 물러나는 거대한 사건이기도 하다. ‘하나 속의 여럿(一中多)’의 실례다. ‘하나 안에 전체가 있고, 전체 안에 하나가 있다’는 종교적 세계관은 설거지통 속에서 역동적으로 구현된다. 무의미에 가까운 일상의 반복이 우주적 성소가 된다.


음식 찌꺼기와 깨끗한 그릇, 부정과 정결은 둘이 아니다. 숟가락 하나의 더러움을 닦아내는 행위가 생명의 원리가 된다. 소소함에 담긴 우주적 진리, 불교에서는 그것을 ‘일즉다 다즉일(一?多 多?一)’, ‘사사무애(事事無?)’의 경지라 한다. 그렇게 작은 주방 속 설거지는 불교의 언어로 하면 꽃들로 장식된 화엄(華嚴)의 세계가 된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2베드 3,8 참조)것이 주님의 세계 아니던가.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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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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