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자주 과거의 고통을 빌려 현재의 길을 묻고는 한다. 지난 4월 13일은, 7세기 비잔틴 황제 콘스탄스 2세의 위협에 맞서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다 유배지에서 굶주려 숨을 거둔 성 마르티노 1세 교황의 축일이었다. 지금 로마와 워싱턴 사이에는 1400년 전만큼이나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사상 첫 미국인 교황 레오 14세를 향해 트럼프 대통령은 “교황은 정신 차리고 상식을 발휘하라”며 날 선 비난을 쏟아냈다. 교황이 전쟁에 반대했다는 것이 이유인데, 이런 언사를 보면, 당파적 ‘강권 통치’의 상태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미 미국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 시기에 임명된 블레이즈 수피치, 조셉 토빈, 로버트 맥엘로이 세 추기경을 통해 트럼프의 강경 정책에 맞설 윤리적 보루를 마련해 두었다. 추기경들은 낙태뿐 아니라 이주민 문제 역시 핵심적인 생명 윤리임을 선언하며 트럼프 행정부의 공포 정치에 맞서왔다. 갈등이 정점에 달한 것은 미국의 이란 침공이다. 맥엘로이 추기경은 이 전쟁이 목적이 불분명하고 최후의 수단도 아닌, ‘일부러 선택한 비극’이라고 말한다. 특히 수피치 추기경은 폭격 영상을 편집해 오락처럼 소비하는 백악관의 행태를 두고 ‘역겨운 비인간화’라고 규탄했다.
레오 14세 교황은 취임 초기부터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단순히 외교 현안이 아니라 도덕적 위기와 생명의 문제로 봤다. 평화가 그 자체로 추구되는 선이 아니라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은 이 세계가 얼마나 깊게 ‘힘의 욕망’에 중독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것은 이익의 갈등을 전쟁으로 증폭시키는 정치의 근본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세 추기경도 성명을 발표하며 교황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강대국의 대통령 한 사람이 벌이는 광란을 보며 교회는 한가하게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마가(MAGA) 세력은 교황이 정치에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며 끊임없이 불평한다. 자기들에게 불리한 문제에는 입을 다물라는 소리일 뿐이다. 반면, 인간 존엄과 공동선, 연대의 기준으로 공적 질서를 비판하고 재구성하는 행위가 정치라면, 교회는 이미 오랫동안 정치적이었다. 교회가 불평등, 낙태 문제, 생명 옹호, 사회 복지, 이민 정책에서 지속해서 공적 발언을 하며 세상에 헌신한 것은 복음이 인간의 삶 전체를 다루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공공의 삶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적 혼돈과 만성적 빈곤 해결을 위해 교회가 오랫동안 실천해 온 ‘육신의 자비 활동’은 모두 정치적 결정이 필요한 사안들이다.
정치는 지역과 국가를 막론하고 공동체의 문제 해결에 필요한 가치들을 찾아내 가꾸어 나가는 공공적 삶의 기술이다. 그래서 교회의 정치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를 두고 형성해 가는 정체성의 문제다. 교황의 목소리는 권력이 계산하는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기억하는 언어에서 출발한다. 전쟁은 생생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사건이며, 평화는 협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야 할 생명의 원칙이다.
신앙인은 공적인 삶에서 신앙에 기반한 가치를 뒤로 제쳐둘 수 없다. 신앙은 실존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교회가 아니라, ‘어떻게’ 정치적인 교회가 되는가이다. 권력의 위협 앞에서도 인간의 길을 묻는 교황의 용기는 증오와 폭력에 길들어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내내 붙들고 있어야 할 윤리적 삶의 지표가 된다. 교황의 전쟁 반대는 이상주의적 호소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이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가장 정치적인 형태를 띤다. 전쟁과 힘이 지배하는 시대에 평화를 끝까지 추구하는 일은 가장 불편하지만, 또한 가장 필요한 정치일 것이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