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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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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시를 읽어요?” 누가 묻습니다. 


“네, 늘 읽지요. 밥하다가도 읽고, 게을러질 때도 읽고요. 생각이 막힐 때, 답이 어려운 문제 앞에서 더 읽어요. 시는 오래 곰곰 생각해야 하는 언어라서, 제 사유와 상상력의 한계를 늘 시험하는 언어라서, 인내심이 필요한 물음표를 마주하고 풀어가는 시간에 슬며시 답이 주어지니까요.”


시는 영성이 깃든 철학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요. 실제로 시인은 철학자에게 중요한 영감을 받기도 하고 철학자의 말이 시인의 말과 통하는 접점도 많습니다. 지난해 내내 몰두했던 번역 시집이 얼마 전 「DMZ 콜로니」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요. 여기서도 시인은 철학자의 말을 화두로 인용합니다. 


시인 최돈미가 프랑스의 사상가 루이 알튀세르에게 기댄 것은 ‘호명(呼名)’, 즉 이름을 부르는 방식에 관한 질문. 개인은 호명에 응답하면서 주체가 되는데, 알튀세르는 그 주체적인 이름이 동시에 사회적 구조에 종속된다는 걸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시집에서 시인은 공적인 역사가 묻어버리고 싶은 상흔을 발굴하여 실험적인 형식으로 보여주는데요. 이를테면 과거 통치자의 계엄령으로 인한 무고한 이들의 희생, 양민 학살이라든가, 고아라든가,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 등, 전쟁과 가난과 억압으로 얼룩졌던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돌아보게 만드는 시집을 번역하면서 저는 또 뭐든 파고드는 버릇대로 시인이 호출한 철학가의 책을 다시 읽었지요.


알튀세르는 현대철학의 한 산맥을 이룬 철학가지만,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살았던 사람. 급기야 정신착란으로 아내를 목 졸라 죽이는 사건 끝에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지요. 하지만 그가 남긴 자서전에는 이런 문장이 있어요. 


“폴 세잔은 무엇 때문에 생-빅투아르 산을 매 순간 그렸겠는가? 그것은 매 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그 모든 비극에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지금 예순일곱 살이다. 그러나 마침내 지금, 나 자신으로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곧 인생이 끝나게 되겠지만, 젊게 느껴진다.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이런 통찰을 할 수 있다니. 이 계절에 그의 말을 곱씹어 봅니다. 빛의 선물은 존재의 충만함을 오롯이 느끼게 하고 그 어떤 슬픔도 다 잊게 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말을 남긴 철학가는 가정이나 학교, 국가, 교회 등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제도가 인간을 길들이는 방식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했는데요. 


저는 이 말을 통해 알튀세르에게 본인도 잘 몰랐을 하느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지 않았나 생각을 해요. 매 순간의 빛을 선물로 느끼는 힘은 신성 외에 다른 걸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참담한 비극을 통과한 연약한 철학자가 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미처 몰랐던 무구(無垢)한 영성의 힘이 아니었을까요. 오월 하루하루, 누구나 이 빛의 축복을 매 순간 놓치지 말고 받으시길 소망해 봅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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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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