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임선혜(아녜스) 씨의 2026년 새해 첫 무대는 콘서트홀이 아니었다. 1월 중순, 전북 시골의 작은 성당과 양로원에서 연 ‘희망나눔콘서트’(이하 희나콘)였다. 희나콘은 그가 ‘음악을 통한 나눔’을 위해 18년째 이어오는 음악회다.
국제 무대 데뷔 28년 차, 미국 뉴욕타임스는 ‘눈부시게 빛나는 소프라노’라 했고, 지휘자 르네 야콥스(Ren? Jacobs)가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연기자 겸 가수 중 하나’라 했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현장이 조금 낯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날 임 씨는 사제관 안에 옹기종기 모여 신자들이 끓여준 라면과 어묵탕으로 몸을 녹이고, 항아리에서 꺼낸 김장김치를 나눠 먹으며 공연했다. 이튿날 양로원 어르신들은 “내가 살아있을 때 이런 걸 언제 또 들을 수 있겠나”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돌아오는 길, 어르신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 먹먹한 마음은 다른 연주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희나콘은 어쩌면 임 씨에게 가장 본질적인 무대다. 큰 무대에서는 얻을 수 없는 초심과 묵상이 절로 일어나는 자리다.
희망을 나누고 받는다
희나콘은 2009년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5월 문화축제에서 시작됐지만, 2013년부터 구조가 전환됐다. 기관이나 본당의 초청으로 ‘희망 공연’을 열고, 그 수익금으로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시골 성당과 복지시설, 병원을 찾아 ‘나눔 공연’을 마련한다. 나눔 공연에서 음악가들은 출연료를 받지 않고 재능을 기부한다.
받은 것을 각자의 탈렌트로 다시 나누는 형식 덕분에, 음악가들의 자존감이 지켜지고 기쁨도 크다. 희나콘이 단순한 봉사를 넘어선 ‘문화’로 20년 가까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이유다.
지난해 여름, 강릉 갈바리의원에서의 경험은 희나콘의 방향을 한층 더 뚜렷하게 만들었다. 1965년 아시아 최초로 호스피스를 시작한 이 병원은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이 운영한다. 오랫동안 자신의 방에 아무도 들이지 않던 환자 한 분이 방 밖의 음악에 마음을 열었다. 마침내 방에 들어와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이틀 뒤 선종했다.
“담당 수녀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 음악이 문을 열었고, 하늘 가실 때 마지막으로 동행한 것이라고요. 그때부터 희나콘은 더 먼 곳, 더 작은 곳으로 가는 게 오래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올해 여름에도 희나콘은 경남 마산과 거제에서 시작해 강원도 강릉을 거쳐 서울까지 5차례 순회공연이 예정돼 있다.
성당에서 온 답
서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학술교류처(DAAD) 장학생으로 칼스루헤 국립음악대학 최고연주자 과정을 마친 그는 1999년 23살 때 고음악의 거장 필립 헤레베허에게 발탁돼 세계 음악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르네 야콥스, 만프레트 호네크, 윌리엄 크리스티 등 시대를 대표하는 지휘자들과 작업했고, 독일 베를린과 함부르크, 프랑스 파리의 주요 오페라 무대를 밟았다. 헨델의 〈아그리피나〉로 BBC 뮤직 매거진 어워드와 그래미 노미네이션, 슐호프 가곡 전집으로 독일음반비평가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내내 그는 하나의 물음을 놓지 못했다.
“노래가 세상에 무슨 의미인가.”
데뷔 10년이 지날 무렵, 그 답이 뜻밖의 방식으로 왔다. 성당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위로’와 ‘기쁨’이라는 두 단어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자신이 세상에 위로와 기쁨을 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 말이 “너 기쁘라고, 너 위로해 주려고”라는 말로 다르게 들렸다. 노래가 먼저 자신에게 기쁨이고 위로라는 것을,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위로받고 기쁜 것이기 때문에, 남들에게도 이 노래가 기쁠 수 있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겼다. 공연 후 찾아와 “당신의 음악으로 일주일이 행복할 것 같다”고 하는 관객들의 말이 진심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 깨달음은 희나콘을 이어가는 밑바탕이기도 하다.
동양인이 바흐 수난곡을 노래하기까지
유럽 고음악계에서 바흐 수난곡은 특별한 영역이다. 매년 사순 시기마다 콘서트홀과 교회 어디서나 연주되지만, 그 레코딩의 소프라노 솔리스트 자리에 동양인이 서는 일은 드물다. 2005년쯤 그에게 기회가 왔다. 녹음도 잘 나왔다. 그러나 결국 노래의 자질과는 무관하게 독일인 소프라노로 대체됐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벨기에 출신의 세계적인 고음악 지휘자 르네 야콥스가 마태수난곡과 요한수난곡의 소프라노 솔리스트 모두를 그에게 맡겼다. 주일마다 성당을 찾는 임 씨를 오랜 협업 속에서 지켜봐 온 야콥스는 “유럽인들이 이 음악을 만들면서 가졌지만, 지금은 잃어버린 것을, 이 동양인이 가지고 있다”고 섭외 배경을 밝혔다 .
임 씨가 공연을 준비할 때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가사다. 외국어 가사를 최소 두 언어로 대조하고 마지막에는 한국어로까지 번역한다. 악보 하나 들고 정자세로 서는 오라토리오(종교 음악) 무대는 그에게 각별하다. 화려한 의상도 무대 세트도 연기도 없이 눈빛과 목소리만으로 전달해야 하는 시간이다.
“발이 다시 땅에 딱 붙는, 저를 겸손하게 하는 음악”이라고 설명한 임 씨는 “노래할 때마다, 남들에게 빼어나게 보여지는 게 아니라, 내 기도가 되게 해달라고 청한다”고 들려줬다.
신앙의 뿌리
부모님의 신실한 신앙과 봉사 활동 속에서 스며든 ‘하느님’은 그에게 자연스럽다. 유럽에서 식사 전 성호경을 그을 때 처음에는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다음 식사 때는 따라 하는 사람이 생겼고, 성당을 함께 가는 동료도 생겼다.
신앙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 성악가에게 활동 영역을 좁히는 편견이 되지는 않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임 씨는 지휘자 만프레트 호네크(Manfred Honeck)에게서 찾는다. 2018년 그래미 최우수 오케스트라 연주상을 받고 현재 미국 피츠버그 심포니 음악감독인 호네크는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계약할 때부터 미사 시간을 조건으로 넣을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임 씨는 호네크가 “하늘에 올라가면 하느님이 ‘너 뉴욕 필 무대에 서봤어? 베를린 필이랑 작업 해봤어?’ 이렇게 묻지는 않으실 것 같다. ‘나한테 물으실 걸 답하고 살아야겠다’”고 했다며, “그 한마디가 지금도 마음에 남는다”고 말했다.
‘달릴 길을 다 달렸다’ 말하고 싶다
그간 드라마 OST, 뮤지컬 공연 등 클래식의 경계를 넘나들어 온 임 씨의 올해 행보도 다채롭다. 연극배우들과 오페라 가수들이 함께하는 창작극, 피아니스트 임윤찬과의 모차르트 투어, 카운터테너 이동규와 20년 만의 러브 듀엣 리바이벌이 예정돼 있다.
올해 초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대학교(UNISA) 주최 국제음악콩쿠르 심사에서 젊은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으며, 젊음의 열정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새삼 느꼈다. 그들에게 더 많은 무대를 열어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떠올렸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달릴 길을 다 달렸다고 후련하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을 맞고 싶다”는 그는 “멋있게 무대를 내려가는 준비를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어떤 음악인으로 기억되고 싶냐고 물었다.
“가사가 잘 전달되는 사람, 모르는 나라의 언어로 노래해도 그 가사가 뜻한 것이 듣는 이의 가슴에 닿는 성악가, 그렇게 기억해 주시면 가장 큰 칭찬이 아닐까 싶어요.” 그러면서 “노래할 때 행복해 보이는 사람, 그건 자신 있다”고 덧붙였다.
희나콘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공연은 원하는 본당이나 기관이 먼저 손을 내밀면 된다. “희망 공연을 열어주신 분들이 곧 나눔 공연의 후원자가 되시는 거예요. 기꺼이 찾아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