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켰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믿어 십계명뿐 아니라 613개의 율법 조항을 지켰다. 예수님 시대에는 1만633개의 율법 세칙을 지켰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백성들 대부분은 그런 조항들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조항을 알았던 율법학자들도 사람들 앞에서는 율법을 지켰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어김으로써 위선자가 되었다. 따라서 유다인들처럼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 중에 구원받을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성직자라 하더라도 구원받을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고, 유혹에 쉽게 빠지는 존재이며, 하느님의 계명을 어길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죄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철학)를 찾았고 불교 스님들은 깨달음을 추구했다. 불교 스님들처럼 깨달음을 얻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면, 구원을 얻는 사람은 1000만 명 중 한두 명 있을까 말까 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스님이 많다. 조계종만 대략 2만여 명이라고 한다. 이 스님들에게 가서 물어보길 바란다. “스님!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고기도 안 먹고 홀로 독수공방하며, 30년, 40년의 세월을 수도생활하셨는데 과연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스님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 못 얻었어. 수도하다 병만 났지 뭐야.” 또는 “깨달음을 얻기가 정말로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어.” 이것이 솔직한 대답이고 이것이 수도를 한 수많은 스님의 경험일 것이다. 수도를 한 수도승이 이러하다면 수도하지 않은, 세속 사회를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돌을 다이아몬드로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일본 정토진종의 창시자 신란이라는 수도승이 있었다. 그는 히에이산에 들어가 20년 동안 여러 가지 고행을 했으나 정욕이 줄어들지 않았다. 수도할수록 정욕은 더욱 불같이 치밀어 올랐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단념하고 하산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이란 이것이다. “내 힘으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그는 자기가 의인이 되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죄인인 그대로, 아직 정욕이 있는 그대로, 아미타불을 믿기만 하면, 귀의만 하면(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구원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의 역사도 소승 불교에서 대승 불교로 그 역사가 넘어가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온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온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깨달음을 추구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다.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