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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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아주 근본적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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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지내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고, 때로 누군가를 도와줄 줄도 알며, 성격도 대체로 원만하다. 이른바 법 없이 살 사람들도 많다. 이들이 누군가에게 의도적으로 피해를 준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집단이나 사회는 이런 개인들이 모였지만 작동 방식은 아주 다르다. 따뜻하기보다는 차갑다. 국가는 전쟁까지 벌인다. 우크라이나에서, 이란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르완다 등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가. 그런데도 멈추지를 못한다. 개인들은 멀쩡한데, 개인들이 모인 집단이나 국가는 서로 총질한다. 이런 모순은 어디서 오는가. 일단 이렇게 설명해 볼 수 있겠다.


가령 A라는 어떤 개인은 가까운 지인 B를 따뜻이 대할 수 있다. 그를 어지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모르는 C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힘들다. 판단을 살짝 유보한다. 더 모르는 D, E, F에 대해서는 소문에만 의지하거나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한다.


A가 F에 대해 잘 모르면 B를 대하듯 긍정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된다. 하지만 잘 모르는 타자를 실제로 그렇게 대하기는 힘들다. 친구에게는 밥을 사줘도, 길거리 낯선 이에게는 그렇게 하기 힘든 것과 같다. 먼 데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판단을 해야 할 경우에는 자기 기준으로 한다. 


더욱이 A가 F의 소식을 듣게 되는 경우는 소문을 통해서일 때가 많다. 우리는 때로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특정 부분을 뾰족하게 강조하거나 과장법을 쓰곤 하는데, 소문은 이런 과장적 표현이 쌓이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집단이나 사회는 이런 과장들이 중첩된 세계인 것이다.


문제는 F도 A에 대해 그렇게 판단하고, 다들 그렇게 한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가까운 이들에 대해서는 도덕적이지만, 모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전체 집단은 비도덕적이 된다. 지인에 대한 이해의 정도보다 모르는 이들에 대한 오해와 무관심의 정도가 비할 수 없이 커진다. 


이런 오해와 무관심이 중첩된 집단이 ‘사회’다. 집단이나 사회는 개인의 도덕성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포장된 소문이나 편집적 뉴스에 기대면서 저마다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하고 판단하는 데서 비롯된 일이다. 이런 자기 중심성이 중층적으로 결합한 사회는 개인의 도덕적 처신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집단이기주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더 많아지면 집단의 이런 모순이 해결될 수 있을까. 문제는 집단과 전체는 개인들의 총합이 아니라는 데 있다. 선한 사람들이 모여도 거대 집단이 되면 그 운영을 위한 상호 약속이 있게 마련이고, 조직과 제도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조직과 제도는 개인의 ‘밖’에 있는 것이고, ‘밖’을 ‘안’과 연결하는 방식은 시대, 상황, 지역,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이 ‘다름들’이 겹치면서 긴장과 갈등이 생겨난다. 누군가 선하게 행동하려 해도, 그 선한 의도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서로 잘 모르는 관계일수록 ‘뭔 속셈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곤 한다. 


그렇게 세계는 상호 긍정이 아닌, 은근한 부정성과 노골적인 자기중심성이 더 커진다. 모든 인간을 긍정하려고 했던 예수나 붓다 같은 위대한 스승들도 기존 사회, 주류 질서로부터 소외되고 심지어 사형까지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 악해서가 아니다. 사회와 국가는 개인의 양심으로 넘어서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세력이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때로는 불가피하게 대다수가 이 비도덕성에 타협하게 된다. 국가는 국익을 추구하는 비도덕적 세력이 되고, 선한 개인도 국익을 앞세우는 정치인에게 한 표를 준다. 그렇게 자기중심성은 몸집을 불리며 거대한 생명체가 된다.


이런 난국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앙공동체는 이런 냉혹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의 유익과 내적 편안함을 우선하는 한, 도리어 이 근본적 모순에 기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신앙과 신학의 넓이와 깊이를 다시 설정해야 할 때인 것이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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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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