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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걸리버 여행기」 - 약자에 대한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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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국 소설을 대표하는 이언 매큐언은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9·11 테러범들이 치명적인 ‘상상력의 실패’를 겪었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만약 그들이 피해자들의 마음과 감정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폭력으로 인해 겪을 고통을 인식할 수 있었다면, 그토록 잔혹한 행위를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갈등을 감내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은 상대방에 대한 연민의 마음 혹은 공감 능력이다. 성경도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타인의 내적·외적 상황을 깊이 살피도록 초대한다. 마태오복음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는 황금률을 선포한다.


1726년 「걸리버 여행기」가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완판되었을 정도로 당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소인국, 거인국, 날아다니는 섬 등의 놀라운 상상력은 독자들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아동문학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사실 인간 본성과 문명의 어두운 면들 그리고 18세기 영국 사회의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대표 풍자소설이다.


제2부에서 유럽의 정치 제도, 전쟁, 화약과 총기의 사용에 대한 걸리버의 이야기를 들은 거인국 브롭딩낵의 왕은 이렇게 말한다. “자네 나라의 인간들은 자연이 이제껏 이 지구상에서 기어다니게 한 벌레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벌레들이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네.”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특히 인간의 이기적 오만함과 거만함에 대한 일침이다.


돈을 벌기 위해 선원들을 대상으로 진료하는 의사였던 걸리버는 어느 날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난파되어, 우연히 소인국에 표류하게 된다. 지극히 평범했던 주인공은 소인국에서 자아와 우월감이 극대화되는 오만함을 경험한다.


개미 같은 소인국 사람들과의 압도적인 신체 차이로 인해 주인공은 보통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절대적 존재가 된다. 그의 우월성은 신체적 감각을 통해 느껴진다. 그들이 쏘아대는 수많은 화살은 그에게 거의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사람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수백 명분의 식사를 한 번에 먹어 치운다.


걸리버는 아무리 많은 군인이 자신을 공격하더라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인국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뿐만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자각한 것이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릴리퍼트인들을 짓밟을 수 있는 절대적 지배의 가능성을 통해 우월감이 내면에 자리 잡는다.


걸리버는 블레푸스쿠 제국의 군함 50척을 밧줄로 엮어 릴리퍼트 왕국의 항구로 모두 끌고 와 적의 침략을 막아낸다. 뭍에 상륙한 그를 황제는 온갖 찬사로 반겼고, 즉석에서 그 나라 최고의 호칭인 나르닥이라는 작위를 수여한다. 걸리버 자신의 우월한 정체성은 내면에서뿐만 아니라, 외적인 인정으로 한층 부풀어 오른다.


소인국에서 우월했던 주인공…거인들 앞에서는 미약한 존재


식민 지배 횡행했던18세기…오만한 권력을 향한 신랄한 비판


복음적인 가치 강조하면서도…실천하기 힘든 현실 드러내


그러나 제2부 거인국에서 주인공은 소인국 사람들의 처지가 되어 굴욕과 무력감을 겪게 된다. 소인국에서 부풀어 오른 자만심에 주변 사람들의 상황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그는, 홀로 남은 땅에서 거인들을 목격하고 처음으로 소인국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릴리푸트 사람 하나가 영국인들 속에 있다면 아주 우습게 보일 것처럼, 내가 현재 이 나라에서 앞으로 얼마나 가소롭게 보일 것인지 생각하면 괴롭기 짝이 없었다.”


소인국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했던 그 신체는, 이제 거인들 앞에서 왜소하고 미약한 존재가 된다. 평소 상대조차 되지 않았던 대상들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쩔쩔매야 한다. 농부의 어린 아들은 그의 한쪽 다리를 붙잡아 공중에 매달아 올린다. 갓난아기는 걸리버를 꽉 움켜쥐고 그의 머리를 입에 넣으려 하다, 그의 비명을 듣고 놓아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걸리버가 여성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면이다. 당시 여성들은 독립적 주체로서 인격과 존엄성을 보장받기보다는, 신체를 타인의 사용이나 쾌락을 위한 대상 혹은 상품으로 취급받으며, 남성에게 종속되었다. 주인공도 어른이지만 항상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채로 옮겨 다니고 보호받아야 하는, 즉 강요된 의존 상태를 경험한다.


농부의 딸인 글럼달클리치는 인형 침대를 개조해 걸리버를 재우며, 옷을 입혀주기도 하고 벗겨주기도 했다. 옷도 여러 벌 만들어 주었다. 18세기 여성 패션의 확산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패션 인형처럼, 걸리버의 몸은 상품화된다.


상품화된 여성의 몸은 응시(gaze)의 대상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농부의 아홉 살 된 딸에게 종속되어 인형처럼 다뤄지는 걸리버도 응시의 대상이 된다. 그의 작은 몸은 호기심 혹은 신기함의 대상으로 관찰되고 전시되며, 구경거리로 돈벌이가 되었다. 심지어 왕비의 시녀들은 그를 ‘구경도 하고’, ‘완전히 발가벗겨서는 품에 껴안’기도 하는 등, ‘아주 역겨’운 행동을 했다.


18세기 영국은 아일랜드를 식민 지배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토지 소유권을 박탈당하고 종교 차별을 받았으며,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아일랜드 성공회 신부였던 스위프트는 누구보다도 억압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걸리버 여행기」뿐만 아니라, 다른 저서들에서도 사람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걸리버 여행기」 제1부와는 대조적으로 제2부에서 주인공이 겪는 굴욕과 무력함은 바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지배하는 자들의 자기중심적 오만함에서 벗어나, 억압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헤아려보도록 초대한다.


미약한 존재가 된 걸리버는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강조하는 소외된 존재들과 구조적으로 비슷한 위치에 있다. 예수님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라고 가르침으로써, 작은 이들이 예수님만큼 중요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요한 존재라는 인식에 멈추지 않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신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히브 13,3)


비록 걸리버는 거인국에서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우습고 골치 아픈 일을’ 당해야 했지만, 그 이후 나머지 이야기에서 도덕적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 여기에 저자의 중요한 통찰이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 사도는 물 위를 걷다 믿음이 흔들려 물에 빠져버리거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복음사가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유는 베드로 사도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복음의 가치를 실천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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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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