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 설교’라고도 불리는 오늘 복음의 골자는, 너희가 제자가 된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마태 10,32 참조)하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마태 10,26)인 까닭이지요. 그분이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숨긴다고 숨겨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기 마련이고, 진리는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마태오 복음이 ‘드러낸다’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아포칼립토’(?ποκαλ?πτω)입니다. 이는 함께하는 단어 앞에 붙어서 ‘~으로부터’ 또는 ‘~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온다는 의미를 강화하는 전치사 ‘아포’(?π?)와 ‘덮거나 감추다’라는 뜻을 가진 ‘칼립토’(καλ?πτω)가 합쳐진 말이지요. 직역하면 ‘덮어진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니, 결국은 감추어진 것이 밖으로 환히 드러난다는 뜻이 됩니다.
아포칼립토는 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라고 하신 말씀에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드러나게(아포칼립토)’ 하는 주체가 성자 예수님이 아니라 성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숨어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직접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느님의 ‘자기 계시(revelatio)’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시는 걸까요?
그것은 “당신 뜻의 신비를 기꺼이 알려주심으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계시헌장」(Dei Verbum) 2항 참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느님께서 드러내시는 계시 진리를 통해 하느님을 뵙고(visio Dei)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하느님 본성에 참여’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라고도 하였습니다.(「신학대전」 I-II, q.3, a.8)
계시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한, 만날 수밖에 없는 진리의 빛입니다. 인간은 그 빛으로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거지요. 계시는 항상 인간에게 ‘눈이 열리는 것’으로 체험됩니다. 이를테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루카 24,16)지요. 그러나 그분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루카 24,31)습니다. 예수님을 못 보던 이들이 다시 알아보게 된 건, 갑자기 또 다른 예수님이 새롭게 등장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아포칼립토가 말하는 하느님의 드러냄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우리 앞에 새로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눈이 열리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눈을 뜬다는 건 때때로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 자신의 나약함까지 고스란히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뜰수록 자기 환상은 무너지고, 꼭꼭 숨겨 두었던 상처가 드러납니다. 나의 위선은 그대로 폭로되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던 나의 삶이 산산이 조각나는 과정을 겪게 되지요.
어쩌면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보기에 앞서, 인간 실존의 나약함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숨겨왔던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마태 10,26)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죄의 경향성을 ‘드러내’ 주심으로써, 당신 사랑과 자비를 ‘계시’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나약함이 드러날수록 그분의 자비 또한 환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