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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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포조 부스토네, 주님의 자비와 프란치스코의 선교 사명 시작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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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년 세상의 것을 버리고 주님을 닮고자 부모를 떠난 프란치스코의 삶은, 자신을 따르는 형제들과 살기 시작한 뒤에도 마음의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구걸과 설교를 하러 떠돌아다니는 형제들을 본 사람들은 “우리는 저런 수도복을 본 적이 없다”며 “마치 야만인들 같아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을 형편없는 사람들로 여기고, 먹을 것을 주는 대신 진흙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기 재산을 모두 버리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얻어먹는 삶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나아가 비난받을 일이기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어려움이 자신들의 생활 양식이 아직 교회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1209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그동안 죄를 짓고 살아오며 쌓인 양심의 무게로 가득했습니다. 마치 양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로마로 가는 도중 포조 부스토네라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리에티에서 18km 떨어진 포조 부스토네는 해발 756m에 자리한 마을로, 리에티 계곡 북동쪽 가장자리 언덕 위에 있습니다. 집들 가운데 일부는 길가에 있지만, 대부분은 언덕을 따라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중세 마을에 들어서면 ‘Buongiorno, buona gente!(안녕하세요, 선한 사람들!)’의 문으로 알려진 고딕 양식의 문에 다다릅니다. 이 문은 프란치스코가 1209년 동료들과 함께 아시시를 떠나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포조 부스토네 주민들에게 건넨 인사를 기념합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기 위해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있는 로마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9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인사말은 여전히 이 마을에 울려 퍼집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인 10월 4일 아침이면, 북을 치는 한 사람이 마을의 거리와 계단을 지나며 모든 집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같은 따뜻한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하세요, 선한 사람들!”


마을에서 성 야고보의 길을 따라 600m 정도 오르면 성 야고보 수도원에 도착합니다. 이 수도원은 본래 사비나에 있는 파르파 대수도원이 소유했던 곳으로, 1217년 프란치스코에게 기증되었습니다.


수도원 광장에는 14~15세기에 걸쳐 세워진 수도원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목조 지붕을 얹은 단일 공간의 성당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수도원의 사각 회랑은 16세기에 조성됐으며, 이곳에는 15세기 움브리아와 토스카나 지역 화풍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성모자상과 17세기에 그려진 프란치스코의 생애 그림들이 남아 있습니다.


수도원 뒤로는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푸른 산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포조 부스토네 마을과 호수, 목초지, 해바라기밭이 펼쳐진 리에티 평야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아래층에는 프란치스코가 도착하기 이전 수도원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는 미카엘 대천사에게 봉헌된 동굴 성당과, 좁은 계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프란치스코 은둔소가 있습니다.


성 야고보 수도원에서 해발 1075m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절벽 동굴’로 가기 위해 구불거리는 산길을 오르다 보면, 이곳에서 있었던 프란치스코와 관련된 사건들을 기념하는 여섯 개의 아주 작은 경당을 만나게 됩니다.



첫 번째 경당이 있는 장소에는 프란치스코가 기도를 바치던 중 갑자기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는 성무일도서가 젖을까 염려해 바위에 기대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바위가 기적적으로 무너져 내리며 성무일도서를 비로부터 보호해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성무일도서가 놓여 있던 자리에는 직사각형 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해집니다. 그 빈 공간은 아시시의 성녀 글라라 대성당에 보존된 성인의 성무일도서와 크기가 같다고 합니다.


두 번째 경당에는 산에 오르다 지친 프란치스코가 바위에 등을 기대고 쉬었을 때, 그의 수도복 두건 자국이 기적적으로 찍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세 번째 경당에는 프란치스코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기대었던 바위에 그의 팔꿈치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네 번째 경당은 악마가 바위 위에 나타나 프란치스코를 유혹하고, 그의 기도를 방해하려 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섯 번째 경당에는 프란치스코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바위가 있습니다. 여섯 번째 경당 안에는 성인의 발걸음을 안심시키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의 발자국이 전해집니다.


이 경당들을 지나면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절벽 동굴에 이릅니다. 바위 절벽 아래에는 14세기 초에 세워지고 16세기에 확장된 두 개의 작은 경당이 있습니다. 이 경당들은 마치 제비집처럼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던 은수처의 동굴을 감싸고 있습니다. 경당 내부는 바위를 깎아 만든 두 개의 공간이 위아래로 겹친 모습입니다. 장식은 거의 없지만, 그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마음을 떨리게 하는 공간입니다.


아래쪽 입구로 들어가면 14세기에 만들어진 작은 제단이 있습니다. 그 위에는 천사가 프란치스코에게 나타나 그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확신시켜 주는 17세기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여기서 바위 절벽에 만든 거친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면, 가난한 프란치스코가 머물던 동굴이 나옵니다. 그곳에는 기도하는 프란치스코와 함께 쉬고 있는 에지디오 복자를 그린 그림이 놓인 작은 제단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가, 죄악 속에서 보낸 자신의 삶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던 프란치스코에게 주님의 용서를 전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체험을 통해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진정한 영적 탄생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코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시고, 그의 수도회가 놀랍도록 확장될 것이라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초기 교부들은 사람의 이성만으로는 볼 수 없고, 하느님께서 스스로 드러내셔야만 볼 수 있는 하느님의 영역을 ‘신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소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운 모습을 드러내신 거룩한 자리임이 틀림없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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