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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쉼터] 50년간 헌책과 사람 품어 온 ‘글벗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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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간은 문을 여는 순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지하 1층에 자리한 헌책방 ‘글벗서점’도 그렇다. 네 번이나 보금자리를 옮긴 이 책방이 성산동에 새 둥지를 튼 지도 어느덧 1년 6개월.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전날 내린 비로 오래된 종이 냄새가 더욱 짙어졌고, 스피커에서는 1980년대 가곡이 흘러나왔다. 빼곡하게 꽂힌 헌책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글벗서점입니다.”


책들 사이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이는 김현숙(클라라)·기광서(스테파노) 부부. 50년 가까이 헌책방을 운영해 온 이들에게 책방은 생업의 공간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사랑방이었다.


헌책과 함께 키운 네 아이


부부가 처음 헌책방 문을 연 것은 1979년이다. 홍익대학교 앞에서 ‘온고당’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따뜻할 온(溫), 옛 고(古), 집 당(堂). 따뜻한 집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었다.


남편 기 씨가 군 복무를 마친 뒤 김 씨와 결혼하면서 시작한 책방은 네 아이를 키운 삶의 터전이 됐다. 당시 온고당은 직원만 3명이 있을 정도로 지역에서는 이름난 서점이었다. 오랫동안 이 일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홍대 앞 온고당’은 헌책방이라기보다 동네를 대표하는 서점으로 기억된다.


이후 부부는 직원에게 온고당을 맡기고, 서대문구 창천동으로 옮겨 ‘글벗서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다. 그것도 어느덧 2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글벗서점은 참고서와 문제집, 그림책이 주력 상품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저렴한 가격에 참고서를 구입하려는 학생들과 학부모들로 북적였다.


이미 누군가 연필로 문제를 풀어 놓은 참고서였지만, 아이들에게는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배움의 공간이 됐다. 생업의 공간이자 아이들의 공부방이었던 셈이다.


“아이들은 새책방 딸이고 싶어 했죠.”


김 씨는 웃으며 오래된 일화를 들려줬다. 어느 날 헌책방을 부끄러워하던 큰딸을 교보문고에 데려가 새 책 한 권을 사 주고, 다시 책방으로 돌아와 책꽂이에 꽂았다고 한다. 김 씨는 딸에게 “이제 이 책도 헌책이 된 거야”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딸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헌책방만의 길을 찾다


글벗서점의 하루는 오전 11시에 시작된다. 쉬는 날 없이 부부는 매일 책방으로 출근한다. 50년 가까이 함께 책방을 꾸려 온 덕분에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역할을 안다.


책방 문을 열기 전 기 씨는 가정집이나 출판사 등을 돌며 헌책을 수집한다. 하지만 아무 책이나 들여오는 것은 아니다.


“새 책방이나 대형 중고서점에 없는 책을 찾습니다.”


부부가 눈여겨보는 것은 정부 간행물이나 오래된 자료집처럼 바코드조차 없는 책들이다. 다른 곳에서는 외면받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책들이다.


사양산업으로 불리는 헌책방이지만 부부는 나름의 생존 전략을 찾았다. 일반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을 갖추는 것이다.


김 씨는 “헌책방에 오는 분들은 단순히 싼 책을 찾는 분들이 아니다”며 “정말 오래된 책의 가치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온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곳에는 교사와 교수, 연구자들이 자주 찾는다.


오래된 자료 속 단 한 줄의 문장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다. 재래시장에서 오래된 물건과 시간을 찾아 걷듯, 글벗서점 역시 오래된 책과 기록을 찾는 이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오늘도 사랑방 문을 열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책방을 지키다 보니 자연스레 단골손님도 생겼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 뒤에도 일부러 책방을 찾는 손님이 적지 않다.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지만 오랜 시간 얼굴을 익혀 온 손님들도 있다.


부부에게 글벗서점은 책을 파는 곳을 넘어,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방이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으로 책방을 한 적은 없어요. 손님들이 원하는 책을 찾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편히 쉬었다 가는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김 씨는 연중무휴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주일 교중미사는 빠지지 않는다. 매일 아침 주모경을 바치며 하루를 시작하고, 그날 찾아올 손님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현재는 셋째 딸이 부부를 도와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부부는 딸에게 선뜻 가업을 물려주기가 미안한 마음이다. 갈수록 독립서점과 헌책방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50년 가까이 이어 온 전통과 역사 앞에서도 현실적인 이유로 영원을 장담할 수 없는 시대다.


그럼에도 부부는 오늘도 문을 연다. 누군가에게는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사랑방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부부는 자신들이 책방을 지키는 동안만큼은 글벗서점이 ‘대한민국의 사랑방’으로 남기를 바란다.


“책을 오래 곁에 두고 살다 보면 겸손해져요. 우리는 모르는 것이 참 많은데 책은 늘 새로운 것을 알려 주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배우고,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반세기 동안 헌책과 사람을 품어온 부부의 얼굴에는 오래된 책처럼 깊고 따뜻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 글벗서점


-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월드컵북로 210 지층


- 운영시간: 매일 11:00~21:30


- 문의: 02-333-1382

변경미 기자 bgm@catimes.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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