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바티칸 뉴스(2026년 1월 15일자)는 Open Doors의 2026년 보고서를 인용하며, 전 세계 약 3억8800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심각한 박해나 차별을 겪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왜 사람들은 박해받으면서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옥중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그는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힘을 저에게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열아홉 번째 서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거룩한 이름을 증언할 힘을 청하였습니다.(스무 번째 서한)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는 결국 ‘예수님의 이름을 포기하라’는 강요였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는 그분의 이름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였다”(사도 5,41 참조)라고 전합니다. 순교자들은 참으로 “당신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시편 119,132 참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와 사명, 권위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복음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다가 박해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오로를 두고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오로는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될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습니다”(사도 21,13 참조)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제1독서에서 즈카르야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이름을 알기 이전 시대의 인물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다가 목숨을 바쳤다는 점에서 그는 구약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3)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었던 힘도 결국 하느님께 대한 희망에서 나왔습니다.
화답송에서는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생각하시어 저를 이끌고 인도하소서. 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니”(시편 31,4-6 참조)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받는다면, 시편의 기도자는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보호와 인도를 청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박해의 이유이면서 동시에 신앙인의 힘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곧 그분께 속한 사람으로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고백입니다.
비록 순교의 칼날 앞에 서 있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 더 내어주며, 먼저 용서하고, 평화와 희망을 선택할 때 우리는 삶으로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언하는 용기입니다. 끝까지 그분의 이름을 붙드는 이에게 주님은 반드시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