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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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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과 믿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보이는 것, 감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앎’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1+1=2이다’라는 수학적 진리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라는 역사적 사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대상이다.

이와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 감각할 수 없는 것,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신앙의 진리나, ‘인간이 사후 심판을 통해 천국, 연옥, 지옥에 간다’라는 교리는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이렇듯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엄연히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을 명확히 이해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지식의 한계를 넘어 더 깊은 믿음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나아가 아는 것이 사물, 식물, 동물, 인간, 자연, 우주와 같은 가시적 대상을 향한다면, 믿는 것은 이를 초월하는 하느님, 영혼, 내세, 천사와 같은 비가시적 실재를 향한다. 지식의 종착지에 다다르면 이 모든 가시적 세계가 보이지 않는 분, 즉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세계는 지식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나침반과도 같다. 결국 믿음의 세계는 지식보다 고차원적이며 깊은 실재를 다룬다.

우리는 하느님을 왜 믿는가? 보이지 않고, 지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고, 우리의 시야와 지성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란 본질적으로 인간 시야 밖에 있는 분이다. 우리의 시야가 아무리 확대되어도, 현미경이든 천체 망원경이든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 되어도 볼 수 없는, 과학 기술 너머에 계신 그런 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믿나이다’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인간이 보고 듣고 만지는 것만을 현실의 전부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 인간 시야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 비현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큰 세계이며 오히려 현실이라는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을 유지하고 가능하게 하는 현실이라고 여기는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믿나이다’라는 고백은 보고 듣고 만지는 것만이 현실의 전부라고 단정하는 생각을 거부하는 선택이다. 이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근원적인 실재이며, 보이지 않는 분이 가시적인 모든 존재를 지탱하고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결단이다.

인간의 정신 안에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인식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은 신앙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초자연적 계시 진리를 인식하고, 이성으로 보이는 사물의 이치를 파악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언급했듯이,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향해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다.

마지막으로 신앙과 지식의 차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앙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데서 기인하지만, 지식은 경험에서 기인한다. 신앙은 교회의 공동체적 믿음에 뿌리를 두지만, 지식은 인류가 쌓아온 학문적 토대에 자리 잡는다. 무엇보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며, 지식은 대상과의 ‘사물적 관계’라는 점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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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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