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2일
사람과사회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레초 마을, 첫 구유 만들어 봉헌한 프란치스코의 베들레헴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주님 성탄 대축일이 가까워지면 떠오르는 도시가 있습니다. 바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과 쌍둥이 도시라고 불리는 그레초(Greccio)입니다. 해발 705m에 자리한 그레초는 라치오(Lazio)주 리에티(Rieti)현에 속한 인구 1500명 정도의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도망치거나 유배된 사람들이 와서 세운 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이름은 Grecia, Grece, Grecce 등으로 변형되어 내려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1223년부터 세상을 떠난 1226년까지 여러 차례 그레초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도시 사람들을 가난하고 단순한 이들로 여겼으며, 그 어느 도시보다도 회개가 많이 이뤄진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곳은 1220년 팔레스타인에서 돌아온 그에게, 자신이 순례했던 예루살렘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활동했던 13세기 초반은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교회는 십자군에 참여하라고 외쳤고, 사제들은 십자군을 위한 봉헌금을 독려했습니다. 말 그대로 교회가 ‘성전’을 외치며, 이슬람 사람들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벌이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그 거룩한 땅에서 그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시대부터 수도자를 가리키는 호칭도 ‘혼자 사는 사람’을 뜻하는 ‘모나코(Monaco)’에서 ‘형제’를 뜻하는 ‘프라테(Frate)’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형제들, 곧 ‘프라텔리(fratelli)’라고 불렀습니다. 이 호칭처럼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이슬람 사람들로부터 떼어 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 사람들 가운데서 함께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슬람 사람들이 지닌 좋은 관습은 받아들여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열심히 기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들이 하던 것처럼 기도 시간 전에 종탑에 올라 종을 울려 모든 사람을 기도로 초대하게 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성지에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그레초에서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코의 마음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 그 거룩한 땅을 만지려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그곳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거룩한 땅은 어디에나 있고, 여러분의 마음 안에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이곳 그레초도 거룩한 땅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1223년 성탄이 가까워질 무렵, 아기 예수를 뵙고자 하는 열망이 프란치스코의 마음속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리에티에 머물고 있던 호노리오 3세 교황의 허락을 받아 이 세상의 첫 구유를 만들게 됩니다. 그 구유는 오늘날처럼 모형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구유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단순한 자리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친구이자 협력자였던 그레초의 귀족 요한 벨리타(Giovanni Velita)에게 여물로 쓸 밀짚과 소 한 마리, 당나귀 한 마리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기쁨에 넘쳐 횃불을 들고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사제는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부제복을 입은 프란치스코는 목각으로 만들어진 아기 예수를 바위 위 움푹 파인 자리에 모셨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던 자리 같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곳에서 강생의 신비를 온몸으로 느끼며 기도했습니다.

제대 위에서 성변화의 신비 안에 예수님께서 오시는 순간, 아기 예수도 함께 오십니다. 마을 사람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 바위 위에 모셔진 아기 예수가 눈을 뜨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당나귀와 소는 밀짚 여물을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소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나귀는 다른 모든 민족을 가리킵니다. 밀짚은 바로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 육화의 신비로 예루살렘의 한 부분이 된 그레초는 모든 세상의 예수님 탄생지가 되었습니다.

탄생 동굴의 제단화는 두 가지 장면을 보여 줍니다. 오른쪽은 예루살렘의 성탄으로, 요셉과 함께 있는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께 젖을 물리는 장면입니다. 왼쪽은 그레초의 성탄으로, 앞에서 설명한 첫 구유의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조토 학파에 속한 익명의 화가가 1409년경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프란치스코가 그레초에 왔을 때, 귀족 요한 벨리타는 마을에 성인이 머물기를 청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기도의 장소를 찾으셨던 것처럼, 프란치스코도 설교와 구걸을 위해서는 마을로 들어갔지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장소로는 마을 외곽의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을 택했습니다. 성인이 머문 곳은 그레초에서 2km 떨어진 동굴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을 은수처처럼 사용했고, 오늘날 그가 잠잘 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돌베개도 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첫 전기 작가로 알려진 톰마소 다 첼라노(Tommaso da Celano, 1185-1265)가 쓴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따르면, 프란치스코가 여러 병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한 은인이 깃털이 들어간 베개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프란치스코는 한 형제를 불러 베개를 치워 달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간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벤 베개에 마귀가 붙어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더 이상 마귀가 내 머리맡에 있는 것을 원치 않으니 그 베개를 치우도록 하시오.”

프란치스코는 그레초의 가난함과 단순함 속에서 예수님을 닮으려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프란치스코를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탄생 동굴과 프란치스코가 기도했던 동굴 위층에는 13세기 말에 만들어진 수도자들의 독방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머물렀던 공간은 가운데 좁은 복도를 두고 양옆에 독방을 배치한 구조입니다. 이 독방들 가운데 오른쪽 첫 번째 방은 성 보나벤투라와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가 사용한 방입니다.

독방 맞은편에는 형제들이 공동 기도를 바치던 나무 기도소가 있습니다. 성무일도서가 귀했던 시절 함께 보았던 커다란 기도서도 눈에 띕니다. 기도소를 지나 반대편에는 프란치스코가 1228년 성인품에 오른 뒤, 프란치스코의 이름으로 처음 봉헌된 성당이 있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6-07-01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7. 22

잠언 19장 21절
사람의 마음속에 많은 계획이 들어 있어도 이루어지는 것은 주님의 뜻뿐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