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인류는 전례 없는 고통과 고립을 겪으면서 “신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질문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끔찍한 파괴를 가져온 전쟁과 자연재해 앞에서 항상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가?”
18세기, 30년 전쟁을 겪은 유럽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강조하던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의 영향으로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추구하는 이신론(Deism)이 대두되었다. 신이 세상을 창조는 하였으나, 그 이후로 인간과 자연법칙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보는 종교관이다. 정교한 시계공으로서의 신은 우주라는 완벽한 시계를 만든 후, 태엽을 감은 뒤 더 이상 시계의 작동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신론은 종교의 중요한 특징인 신비성을 지워버림으로써 인간 보편의 이성에 호소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유물론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조차도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신의 꼬리를 물어버린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계몽주의가 덮어버린 신화와 신비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 의미 없는 기다림 속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 상징
하느님의 침묵 계속된다 해도 유혹과 허상 떨쳐내고 참된 부활 구원에 이르러야
20세기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사무엘 베케트는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신의 부재와 침묵의 중요성을 그려내고 있다. 비록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과 응답을 주지 않는 차가운 세계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신의 부재와 침묵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현존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 암시한다.
2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1막과 2막은 상황 설정과 대화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있는 길가, 두 남자 주인공인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은 전날 그랬던 것과 같이 비슷한 시간에 다시 만나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며 무의미하고 지루한 대화를 이어간다. 막이 내릴 때쯤에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의 소식을 전한다.
극에서 고도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단순한 물리적 부재가 아니라, 도착이 끊임없이 연기된다. 그는 언제나 곧 도착할 것만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그리고 각 막에서 소년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는 고도의 약속을 전한다. 두 주인공이 내일을 기약하며, 다시 막은 내린다.
비록 고도는 등장하지 않지만 언어를 통해 현존한다. 그는 고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의 도착에 대해서 논의되고, 기다림의 대상이며, 소년을 통해 그의 약속이 전달된다. 그의 부재는 언어 전반에 배어든다. 대화 대부분은 결국 고도로 귀결된다. 그는 누구이며 언제 올 것인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였는가?
고도의 부재는 언어적 현존을 통하여 의미를 형성하며 사람들의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디디와 고고의 기다림은 나아가지 못하고 반복적인 행위만 되풀이한다. “만일 안 온다면?” / “내일 다시 와야지.” / “그리고 또 모레도.” / “그래야겠지.” / “그 뒤에도 쭉.” 고도의 부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부재 ‘ 때문에’ 그들은 행동한다.
디디와 고고는 기다림을 중심으로 삶을 형성하고 이어간다. 만약 그가 나타난다면 그들의 기다리는 행위는 끝날 것이고, 연극도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작가는 고도의 도착하지 않음을, 즉 그의 부재를 의미 생성의 중심 동력으로 전환한다. 욕망은 소유가 아니라 반복되는 도착하지 않음에 의해서 지속되기 때문에, 고도의 부재는 욕망 그 자체의 구조를 형성한다. 그래서 그의 부재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닻이 되고, 기다림은 그들의 존재 양식이 된다.
동시에 고도의 부재는 그냥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조건이 된다. 기다림은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진다. 디디와 고고는 그의 부재에 대한 언어들을 함께 공유하고,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확인한다. 고고는 디디에게 “내 곁을 떠나지 말아”라고 부탁한다.
디디는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라고 말한다. 고도의 정체성, 도착 여부, 이 모든 것들이 혼란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공동체적 확실성을 확인한다. 부재에 대한 공통의 언어는 공동체의 핵심 요소이다.
고도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절대자 혹은 신으로 해석되지만, 작가 자신도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규정하지 않는다. 열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두 주인공의 기다리는 행위는 그리스도교 신앙 행위와 그 맥을 같이한다.
일상 안에서 절대자 하느님은 육체적으로 현존하지 않으신다. 개인의 고통 앞에서, 사회적으로 끔찍한 사건 앞에서 하느님은 종종 침묵하신다. 그러나 부재와 침묵의 하느님은 말씀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그 말씀은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다. 동시에 그 말씀을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지속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부재의 언어와 드라마에서 부재의 언어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미 하느님과의 계약과 육화 신비를 통하여, 기다림이 의미가 있음을 보증하는 서사가 있다. 하지만 극에서 드러나는 부재의 언어에서는 고도가 내일 올 것이라는 소식만 반복될 뿐 기다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 기다리는 신앙적 행위만 있다.
내용이 없는 기다림은 부재 언어의 취약성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고도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나는데, 그에 관한 말들은 일관성이 없다. 소년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계속 바뀐다. 언어로 표현되는 고도의 정체성도 명확하지 않다. 두 주인공의 기억은 신뢰할 수 없다. 언어를 신뢰할 수 없기에, 그의 현존은 안정적이지 못하다. 고도는 언어를 통해서 현존하지만, 동시에 그 언어는 현실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또한 그의 부재는 독특한 시간의 역동성을 형성한다. 그의 도착은 계속해서 연기되기 때문에, 진전 없이 반복만 있을 뿐이다. 도착 없는 기다림은 서사를 정지 상태로 가두어 버린다. 두 인물은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을 경험한다. 항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기다림과, 같은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다.
두 주인공은 바로 성토요일의 경험 안에서 맴돌고 있다. 성토요일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경험이다.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절규, 즉 하느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며 세상이 멈춘 성토요일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성토요일은 일시적이며, 결국 부활로 나아간다. 그러나 고고와 디디는 부활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죽음과 부활 사이의 부재와 침묵의 상태를 끝없이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작가는 이 극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혹은 기다려야만 하는 인간의 실존에 관한 통찰력을 예리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하지만, 결코 죽지 못하는 고고와 디디의 모습은, 절대자의 부재와 침묵 앞에서 인간의 삶이란 곧 기다림이라는 인간 조건을 강조한다.
문제는 기다림의 대상이다. 육화 신비가 일어난 지 2000년이 지난 오늘날, 합리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과학 문명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어쩌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조차도 육화 신비의 하느님이 아니라, 고고와 디디처럼 명확하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미 부활이 왔음에도, 여전히 성토요일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