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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6) 역사상 첫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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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오전 8시 명동성당 내에 농성 중이던 장현일 쟁의실장 등 한국통신 노조원 6명에 대한 경찰의 기습적 구속 연행으로 한국교회 사상 첫 공권력 투입 사태가 벌어진 가운데 명동본당 사제단은 ‘현 정부는 2000년 동안 지켜온 교회의 관례법을 침해했다’고 규정하고 ‘2~3일 내로 사제단회의 소집을 요청하고 서울대교구 차원에서 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겠다’고 발표했다. 사제단은 ‘정부의 공권력 투입은 5공과 6공 군사 독재 시절에 지탄받던 비도덕적인 권력의 남용과 현 정부의 모습도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전했다.”(가톨릭신문 1995년 6월 11일자 1면)

1995년 6월 6일, 현대사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거룩한 공간으로 여겨지던 명동성당과 종로구 조계사에 경찰이 전격 투입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과 통신시장 개방, 한국통신 민영화 추진, 노조 간부 징계·사법처리 방침에 반발해 투쟁하던 한국통신(현 KT) 노동조합 간부들을 강제 연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명동성당은 1970년대 유신 체제와 1980년대 제5공화국의 군사 독재 시절에도 민주화 운동가들과 약자들을 품어 안았던 ‘성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사 독재 정권조차 넘지 못했던 이 성역의 문턱을,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안고 탄생한 ‘문민정부(김영삼 정부)’가 무력으로 유린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1995년 명동성당서 농성하던 한국통신 노조원 강제연행

종교계, “성역 침탈” 강력 반발… 4개 종단 공동 침묵시위

사태의 사회적 배경

우선 당시 한국 사회를 관통했던 세계화 질서로의 편입과 신자유주의적 노동 재편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한국통신 파업 사태는 단순한 사업장 내의 임금 협상 결렬이 아니라, 국가의 거시적 경제 정책과 노동계의 생존권이 정면으로 충돌한 구조적 모순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정부는 ‘세계화’를 최우선 국정 지표로 내걸고,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공기업 민영화를 강도 높게 추진했고, 노조는 통신 시장 개방 반대와 대기업 위주의 통신 산업 민영화 중지를 요구했습니다. 노사 간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는 가운데,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는 노조의 주장을 ‘국가 전복의 저의’라고 규정하고 엄중한 사법 처리를 지시했습니다.

경찰, 두 차례 명동성당 난입

정부의 강경 대응 방침에 따라 경찰은 노조 간부 20여 명에 대한 검거에 돌입했습니다. 노조 지도부는 5월 22일 공권력의 출입이 제한되는 명동성당과 조계사로 피신해 무기한 천막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농성 초기, 명동성당 측은 당혹감 속에서도 이들을 보호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노조 간부들에게는 극한투쟁을 자제할 것을 설득하고, 사측과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타협안을 마련하기 위한 중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6월 초, 정부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악화된 국정 지지율을 만회하고 보수층을 결집하기 위해, ‘통신 대란’을 구실로 대화와 타협 대신 무력 진압을 선택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경찰의 명동성당 난입은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경찰은 6일 오전 8시, 5월 22일 이후 3주째 농성 중이던 한국통신 노조 간부 등 6명을 전원 연행했습니다. 전날인 5일 조계사 측과 중재안을 마련해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명동성당 측은 정오에 사제단 기자회견을 갖고 배신감과 당혹감을 표명했습니다.

7일 저녁 9시 40분경 경찰이 재차 명동성당 내에 진입해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소속 대학생들을 무차별로 연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과 시민, 성당에서 교리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신자들, 성당 직원들까지 연행됐습니다.

 

법치주의와 인권 보호 놓고 보수·진보 단체 극심한 대립

변화하는 사회 속 교회 역할 새로운 방향성 찾는 계기로

성역 침탈에 거센 분노

전두환 정권의 군홧발마저 멈춰 세웠던 성역이 유린당하자, 종교계와 시민사회는 비통함과 함께 정권의 비도덕성에 대해 크게 분노했습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이틀 뒤 특별 메시지를 발표, 명동성당이 독재 시절에도 성역으로 지켜진 것은 ‘치외법권 지대’여서가 아니라, 불의에 쫓기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종교적 양심과 이를 존중해 준 시민사회의 도덕적 합의 덕분이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명동성당을 짓밟은 것은 곧 “(문민)정권 탄생의 모태를 짓밟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습니다.

들불처럼 번지는 분노에 정부는 다급해졌고, 6월 16일 이홍구 국무총리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담화는 법 집행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명동성당이 치외법권 지대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해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 한국 사회는 교회가 법치주의를 훼손한다는 보수 세력과, 노동자의 정당한 권익 주장을 폭력으로 짓밟고 종교를 모독했다는 진보 단체와 종교계의 규탄 사이에서 극심한 대립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습니다.

정치적 역풍과 명예 회복

정부가 명동성당 난입이라는 자충수를 둔 것은 6월 27일로 예정됐던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문이었습니다. 지지율이 폭락한 상황에서 정부는 보수 기득권층의 결집을 겨냥, 강한 정부의 이미지를 연출하려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거센 분노가 반정부 여론에 불을 질렀고, 집권 여당은 참패해 문민정부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위태로워졌습니다.

국가 전복 세력으로 낙인찍혀 명동성당에서 끌려 나갔던 노동자 대부분에 대해서도 그 혐의가 벗겨졌습니다. 결정적인 역사적 평가는 2006년에 내려졌습니다.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1995년 당시 해직 및 구속된 한국통신 노조 간부 26명 전원의 투쟁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하고 복직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성역’의 자발적 해제

이 사건은 한국교회와 명동성당에도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1995년 공권력 투입 이후, 명동성당은 각종 단체와 노조의 농성장으로 변모하며 몸살을 앓게 됐습니다. 그해 12월, 결국 명동성당은 정상적 신앙 활동을 저해하는 집회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이후 1997년 민주노총 지도부와 한총련 학생 농성, 1998년 퇴출 은행 노조 농성, 2000년 한국통신 노조 2차 농성 등 수많은 농성에서, 성당 측은 적극적 개입을 통해 자진 해산을 유도했습니다. 2000년 12월에는 관할 중부경찰서에 ‘시설보호요청’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교회 안에서는 종교 본연의 기능 회복이라며 지지하는 입장과, 약자를 배제하고 교회의 기득권 계층화라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됐습니다. 이러한 상반된 견해들은, 2010년대에 이르러 명동성당 구역에 대한 대규모 재개발이 이뤄짐에 따라 어느 정도 그 방향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즉,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본주의적 거대 소비 공간으로 재편된 명동성당 일대에서, 더 이상 사회적 약자의 농성이나 공권력과의 대치가 벌어지던 ‘성역’의 면모를 찾아보기는 어렵게 됐습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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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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