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로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좋은 의도로 말했는데 왜곡 전달되거나, 누군가의 오해까지 사면 씁쓸하다. 화가 나기도 한다. 나의 선한 의도가 달리 전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인 이유는 ‘의지’와 ‘행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의지’란 ‘~하려고 함’이다. 사물과 사태를 이성적으로 판단한 뒤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는’ 내적 자세다. ‘실행하려고 하는’ 상태, ‘실행해야지’ 하는 내적 다짐이다. ‘실제로 행하기’ 직전의 단계다. 철학자 칸트는 이성이 나침반처럼 인간 본연의 도덕 법칙의 방향을 보여주면 그 방향대로 따르려는 내적 마음이 의지라고 해설했다. 이성이 방향을 밝혀주면 그에 따라 의지라는 엔진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부릉부릉하는 엔진의 힘을 받아 실제로 차가 움직이면서 생긴다. 사람이 무언가를 ‘하려고 함’과 그것을 실제로 ‘함’의 영역은 아주 다르다. 차가 가만히 있을 때와 움직일 때의 차이에 비할 수 없이 다르다.
말이든 행위든 실제로 ‘함’은 예상 밖의 경로로 나아간다. 다양한 갈래를 만들며 무한한 파장을 일으킨다. 실제로 한 말과 행위는 의지의 영역을 떠나 다른 환경에 있는 타자를 매개로,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전달된다. 사태는 상상 밖의 갈래들을 만들며 전개된다. 내가 ‘하고자 함’이 나와 다른 너를 만나 완전히 다른 길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떤 신부님이 강론 중에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인용하며 한국 무속의 원초적 종교성에 대해 좋게 말했다고 치자. 어떤 신자는 그 강론의 일부를 긍정적으로 듣고, 어떤 신자는 무언가 꺼림칙해 하고, 어떤 신자는 딱히 감흥이 없다. 강론이 인상적이었던 어떤 신자가 미사 후에 지인들과 무속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으로 연결되고, 한국적인 것이라고 해서 좋기만 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의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강론을 좋지 않게 들은 신자는 나중에 ‘저분은 강론 중에 왜 무당 얘기를 하시냐’며 자기의 부정적 느낌과 생각을 여기저기 퍼뜨린다. 그의 지인은 ‘그 성당 좀 위험한 것 아니냐’며 부추긴다. 누군가는 무속의 긍정적 의미를 생각하고, 누군가는 일부러 점을 쳐보며, 누군가는 무속을 더 경계한다.
특히 부정적 이야기들은 여러 갈래를 만들며 더 증폭된다. 누군가를 부정할 때 그렇게 부정하는 자신이 긍정된다는 착각이 부정성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어떻든 누군가 속 생각을 실제로 표현하고 나면 거기에 저마다의 각종 이야기와 판단들이 뒤섞이며 복잡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하고자 함’과 실제로 ‘함’이란 그런 것이다. 이렇게 강론해야겠다는 신부의 내적 의지와 그 외적 표현 간에는 비할 수 없이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은 신부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적용되는 원리다.
내적 의도가 외적으로 표현되면서, 개인의 의도와는 확연히 다른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중층적으로 전개되어 간다. 모두가 자기가 경험한 만큼 듣고, 듣고 싶은 것을 들으며, 전달할 때는 자기 생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장되게 말하는 내용들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어떤 말이나 행동을 실제로 할 때, 너를 인정하려는 마음으로 하느냐, 사람의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렇게 해도 개인의 선한 의지에 언제나 부합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과를 예단할 수도 없고, 개인이 결정할 수도 없다. 하물며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사실상 ‘혐오’ 발언을 하는 데서 생기는 부정적 파장은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누구를 힐난하거나 비판하는 ‘함’이 아니라, 가능한 살리려는 ‘함’이어야 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내면의 선한 의지가 외적으로 표현되면서 만일 사태가 복잡하게 꼬인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몫이다. 인간은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하게 말하려 하며 그에 어울리게 살려 노력할 뿐이다. 그것이 인간의 의무다.

글 _ 이찬수 박사(종교평화학자, 가톨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