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리에티 지역, 수백 년 된 참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해발 550m의 폰테 콜롬보(Fonte Colombo)는 원래 파르파 베네딕도 대수도원의 소유지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곳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이미 은수자들이 사용하던 작은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경당을 중심으로 기도 생활을 이어 갔고, 오늘날에도 경당 안에서는 그가 직접 벽에 그렸다고 전해지는 ‘타우(ת)’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탈출기 12장에 나오는 파스카 축제에 대한 이야기에서 직접적인 타우를 언급하진 않지만, 문설주와 상인방의 형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피의 문은 그들의 히브리어 알파벳 타우(ת) 모양과 같았고 이 표시는 ‘이집트로부터 해방’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우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알파벳이며 세상의 마지막 날을 상징하는 예언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어의 마지막 알파벳인 오메가(Ω) 또한 요한묵시록에 쓰인 것처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타우를 처음 접한 것은, 제4차 라테란공의회가 있던 1215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개회식에서 언급하면서라고 합니다. 교황은 에제키엘서의 타우 표식을 인용하며, 자신도 모든 교회가 가난한 옷을 입고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인장을 이마에 찍어주길 희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그의 나이는 죽음까지 1년도 안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도전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던 많은 군중 사이에 프란치스코가 있었고 교황의 말씀은 메아리가 되어 프란치스코에게 강한 부름으로 마음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더욱 열정적으로 참회와 회개로 이끄는 설교를 하였고, 그 표시로 자신 가까이 오는 모든 사람에게 타우의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표식은 사람에게만 그친 것이 아니라, 서명처럼 자신의 편지와 자신이 기도하던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에도 그려 넣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타우는 참회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었고 그리스도의 삶과 승리의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타우 십자가는 프란치스코에게 누구보다도 특별하였고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샘물을 뜻하는 ‘폰테(fonte)’와 비둘기를 뜻하는 ‘콜롬보(colombo)’가 합쳐져 만들어진 ‘폰테 콜롬보’라는 이름은, 프란치스코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작은 비둘기들이 샘물 주위에 모여 물을 마시고 있던 모습에서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 샘물을 마시며 평화를 누리는 비둘기들을 보면서, 프란치스코 또한 주님의 생명의 물을 마시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성인이 살아 있을 당시, 프란치스코회는 이미 수천 명의 형제를 거느린 공동체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의 선종 이전부터 형제들 가운데는 프란치스코의 규칙이 너무 금욕적이고, 개인과 공동체의 절대적 가난을 지키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또 설교를 통한 선교 생활에도 맞지 않는다며, 기존 수도원주의와 금욕주의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성인은 수도회 총봉사직을 사임하고, 1223년 폰테 콜롬보에서 40일간 단식한 뒤 완화된 규칙서를 마련해 호노리오 3세 교황에게 인준을 받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 가운데에는 이 규칙서마저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해, 그것이 교황의 손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며 없애려 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 규칙서가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시어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 규칙서를 지키지 않으려면 수도회를 떠나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전했습니다.
결국 1223년 11월 29일 호노리오 3세 교황은 인준된 규칙서를 반포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폰테 콜롬보는 모세가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은 것처럼, ‘프란치스코의 시나이산’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6세기 베네딕토 성인이 건물 안에 사는 정주 수도원을 위한 보편적인 규칙서를 썼다고 한다면, 프란치스코는 수도원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건물을 허물고 세상 밖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사는 새로운 규칙서를 쓴 것입니다.

폰테 콜롬보와 관련된 프란치스코 생애의 두 번째 중요한 순간은 선종 1년 전인 1225년에 일어났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제5차 십자군 시기에 이집트까지 가서 이슬람 최고 지도자인 술탄 알카밀을 만났고, 그에게 그리스도교로의 개종과 평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눈병을 안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여기에 1224년 오상까지 입으며 실명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렀고, 결국 자신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우골리노 추기경의 권유로 눈 수술을 받기 위해 폰테 콜롬보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리에티에는 교황이 머물고 있었고, 유능한 안과 의사들도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수술은 고문과 다름없을 만큼 끔찍했습니다. 눈으로 흐르던 고름을 막기 위해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귀에서 눈썹까지 찔러 넣는 방식이었습니다. 성인 곁에 있던 형제들은 그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해 눈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서 달아났고, 그곳에는 성인과 의사 그리고 뜨겁게 달궈진 쇠막대만 남았습니다.
그 순간 성인도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불의 형제’를 부르며 고통을 덜어 달라고 간청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눈 옆으로 파고들던 쇠꼬챙이의 뜨거움이 사라졌습니다. 다시 돌아와 프란치스코를 본 형제들은 주님의 자비에 찬미를 드렸습니다. 비록 수술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성인은 이 체험을 통해 자신이 지은 <피조물의 찬가> 안에 불의 형제에 대한 내용을 쓰게 됩니다.
“내 주님, 불 형제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그는 아름답고 쾌활하고 씩씩하고 힘차나이다.”
성인의 형제애가 동식물을 떠나 물질에도 있었음에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