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지식인은 “인간 본성의 새로운 탄생”이라며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폭력과 억압 정치로 변질되어 버린 혁명에 실망한 영국의 시인 새뮤얼 콜리지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제도적 혁명도 필요하지만, 각 “개인의 내적 회심”이 우선적으로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완벽한 제도가 있더라도 미성숙한 사람이 운영하면 그 제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갈등을 빚었던 부분이 바로 제도와 내적 태도의 문제이다.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고 반문하신다. 율법의 완성은 제도적 보완이 아니라, 한 인간이 보여주는 생명과 자비다. 총 1752개로 이루어진 교회법전의 마지막 조항은 “영혼들의 구원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에서 항상 최상의 법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정의(正義)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이다. 영어 단어 justice는 ‘공정한 행위’, 혹은 공정성을 이루기 위한 ‘법 집행’ 등을 의미한다. 올바르고 공정함은 한 개인의 행동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등의 관계를 규정하는 본질적 가치이다.
은 식기 훔쳐 달아났던 장발장, 용서받은 뒤 타인에 대한 자비·자기희생 실천
인간 구원시키는 ‘참된 정의’, 자비와 용서로 존엄성 회복하는 진정한 혁명
1862년 출판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19세기 프랑스의 여러 혁명과 정치적 혼란, 산업화, 빈곤 등의 감당하기 어려운 소용돌이 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는 대서사시이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특히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인간을 구원시키는 참된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자베르 경감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며 준법정신이 철저한 타락하지 않은 경찰이다. 그러나 장발장의 대척점에 서게 되며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 이유는 법적 정의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에게 법은 인간의 제도를 넘어서 거의 신성한 도덕적 질서이다. 그는 자신을 “악을 짓밟아 없애는 천상의 사명을 수행하는 정의와 빛과 진리의 화신”으로 생각하였다. 법은 타협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기 때문에, 법에 대한 절대적 순명이 요청된다.
따라서 선과 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세상에 오로지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법을 어긴 사람은 죄수들로서 악한 사람, 법을 잘 지킨 사람은 존경받을 만한 선한 시민이다.
선함과 악함 사이의 애매모호한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베르는 누군가가 법을 어겼을 때, 왜 그러한 상황이 발생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범법자는 그저 범법자일 뿐이다. 더욱이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즉 악에서 선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다. 한번 구별된 선과 악은, 그 상태로 고정되어 버린다.
이러한 자베르의 법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인간 존엄성의 결여이다. 사람들에 대한 그의 판단은 주로 사회적 신분과 법적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가난한 사람, 매춘부, 거지, 전과자 등의 법을 위반할 가능성이 높은 하위 계층의 사람들은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존중이나 연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엄격한 법의 심판, 벌, 응징의 폭력적인 방법이 정의이다.
자베르와는 대조적으로, 장발장에게 정의는 인간 존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출소한 전과자에게 발급되던 노란색 통행증은 사회적 차별과 불신의 상징이었다.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 환대가 필요한 한 인간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선에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장발장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한다.
주교는 장발장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수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존엄성을 바라본다. 팡틴이 사람들 앞에서 체포되어 굴욕을 당하고 있을 때, 장발장은 자베르의 엄격한 율법주의에 도전한다. 자베르는 팡틴이 저지른 잘못만을 지적한다. 그러나 장발장의 첫 질문은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아니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녀의 이런 상황에 사회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먼저 물어본다.
샹마티외라는 노인이 사과를 훔치다 체포된다. 법정은 그를 탈옥수 장발장으로 오인한다. 마들렌 시장으로 신분을 숨기고 살던 장발장은 침묵해버리면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자수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달콤한 목소리도 듣지만, 자신을 대신해서 노인의 삶을 희생시킬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자수한다. 아무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어도 근본적인 존엄성은 지켜져야 한다.
장발장의 인간 존엄을 근간으로 하는 정의는 타인에 대한 책임감으로 확장된다. 길거리에서 체포될 위기에 처했던 팡틴을 구출해 병원에 입원시키고, 임종까지 돌본다. 그녀와의 약속대로 코제트를 찾아 돌봐준다. 바리케이드에서 총상을 입고 기절한 마리우스를 망설임 없이 업고, 파리의 복잡한 하수구를 통해 구출한다.
궁극적으로 장발장이 추구하는 정의는 범죄자에 대한 응징보다는, 자비와 자기희생을 근간으로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불신과 차가운 분노로 가득 찼던 그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은, 19년 동안의 감옥 생활이라기보다는, 은 식기를 훔쳐 달아난 그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자비와 용서이다.
바리케이드 안에서 경찰 스파이로 들통난 자베르는 혁명군에게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장발장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그러나 오랫동안 절대적 법의 심판을 믿었던 자베르는 장발장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확신이 사라진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 법의 눈에도 눈물이 흐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신에게 의존하는 정의였다. 그는 지금껏 이런 정의는 알지 못했다. 도덕의 태양이 암흑 속에서 무섭게 뜨는 아침이었다. 아침이 그를 겁나게 했다.”
범죄자였던 장발장이 도덕적으로 자신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변화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한 인간의 파멸이라기보다는, 법에 갇힌 정의의 한계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레 미제라블은 혁명의 이야기다. 구시대의 악습을 개혁하는, 혹은 정의로운 사회를 회복하는 혁명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존엄성 회복은 혁명이나 법적 정의가 아니라, 한 개인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능하다.
바리케이드 에피소드는 1832년 6월 파리 봉기를 배경으로, 부조리한 세상과 가난에 맞선 민중의 저항, 그리고 자유 평등 박애의 인류애를 상징하는 서사의 절정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적 미래의 열망은 폭력적인 현실과 죽음으로 얼룩진 비극의 공간이다.
예수님도 혁명가이다.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십자가 사건을 ‘위험한 기억’으로 해석한다. 십자가의 희생을 믿는 사람들은 부정의한 현실 앞에서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혁명의 중요한 특징은 소외당한 사람, 죄인, 혹은 병자 등, 한 개인의 근본적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